금산고등학교 청소년기자단 금강환경감시단 ‘금강생태여행’ 금산 백제의 군사 요충지

【금산=코리아플러스】 양귀연·오유석·박성민·김정호·권준혁 기자 = 금산고등학교 청소년기자단 금강환경감시단은 6일 2018 코리아 힐링 페스티벌 ‘금산’ 금강생태여행 6차 금산 금산역사문화박물관과 금산인삼관 등을 방문하는 지식강국코리아만들기 현장 토론회를 가졌다.

금산고등학교 청소년기자단 금강환경감시단은 이날 금산인삼관을 찾아 인삼의 과학과 산업 등을 관람했다.

이어 금산역사문화박물관을 찾아 금산의 선사시대인 구석기와 신석기, 청동기문화를 관람했다.

이어 철기시대의 가야문화와 함께 백제시대를 금산역사문화박물관의 학예사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그러면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금산의 역사와 문화를 청취한 뒤 고려시대와 근·현대사를 거쳐 현재의 금산을 살펴봤다.

청소년기자단은 문화해설사로부터 금산의 백제 역사를 들었다. 특히 백제의 영호와 백령성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근초고왕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
“北으론 대동강 하류, 南으론 전남 해안”

■ 한성백제박물관 학술회의

“남북으로는 대동강 하류에서 전남 남해안까지, 동으로는 춘천·화천, 서로는 바다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동으로는 춘천·화천 일대, 남북은 예성강 이남에서 전북 고부와 김제 일대까지만 영유했다.”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룩한 제13대 임금인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 백제 영토는 과연 어느 정도 범위였을까.

지난 3월 30일 서울 송파구 위례성대로 올림픽공원 내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종합토론의 좌장을 맡은 이현혜(사학) 한림대 교수는 근초고왕대 영토의 최대 범위와 최소치를 이같이 정리했다.

‘근초고왕 때 백제 영토는 어디까지였나’를 주제로 열린 이날 행사는 한성백제박물관(관장 이인숙)이 매년 봄·가을 두 차례씩 백제사 가운데 쟁점이 되는 주제를 잡아 끝장토론 형식을 가미해 열고 있는 학술회의로, 지난해 하반기에 이어 두 번째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는 노중국(사학) 계명대 교수의 주제제안 발표에 이어 백제의 동북 및 서남 방면 진출에 대해, 문헌사학자인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와 강종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연구위원, 고고학자인 심재연 예맥문화재연구원 조사부장과 서현주(문화유적학) 한국전통문화대 교수가 각각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 초기 한성백제(기원전 18∼475년)의 영토와 근초고왕 때 북쪽 경계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조에는 “북으로 패하(浿河·예성강), 남으로는 웅천(熊川·안성), 서로는 대해(大海·서해), 동으로는 주양(走壤·춘천)에 이르는 강장(疆場·영토)을 확정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임 교수가 주제발표에서 밝힌 대로,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인 온조왕대에 이 같은 영토를 확보했다고 믿는 연구자는 없다. 후대의 상황이 온조왕대 기록에 편입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노 교수는 통설인 백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닦은 8대 임금 고이왕(재위 234∼286)대의 상황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3∼4세기 한성백제의 대단위 취락이 발굴된 강원 화천군 원천리 유적의 존재가 고이왕대 백제가 이곳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라고 말했다.

노 교수는 근초고왕 때 백제의 영토가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확대됐다고 덧붙였다.

반면, 고조선 시대 이후 패수(패하)의 위치 또는 패수로 불린 강이 압록강에서 대동강, 청천강, 예성강으로 계속 바뀌어 온 사실을 지적한 임 교수는 “온조왕 본기의 강역(영토) 확정 기사는 패하를 대동강으로 인식한 근초고왕대 백제인의 인식이 투영돼 있다”며 “고이왕대가 아니라, 대동강 이남까지 영역으로 확보했던 근초고왕대의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 동북쪽 경계인 화천군 원천리 유적의 연대는 = 지난 2010년 확인된 화천군 원천리 유적은 한성백제가 춘천 등 강원 영서 지역을 영유해 내륙교역로를 확보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지만, 유적의 연대와 관련해선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유적을 직접 발굴한 심 부장은 한성백제 중앙양식 토기를 기준으로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전반 사이를, 종합토론에 참여한 이성주(고고인류학) 경북대 교수는 마구를 기준으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까지를 각각 원천리 마을의 연대로 제시해 100년 정도의 차이가 났다.

◆ 남쪽 경계의 쟁점:영산강 유역과 전남 남해안 일대까지 지배했는가 = 노 교수는 전북 김제 벽골제가 근초고왕의 아버지인 비류왕 27년(330)에 축조되고 시기가 분명하진 않지만 고사부리성(전북 고부)이 축조됨으로써 근초고왕 이전에 백제의 전북 지역 영역화가 일단락된 것으로 보았다.

이런 바탕 위에 ‘일본서기’ 신공기 49년(249)조에 나오는 백제장군 목라근자(木羅斤資)의 남방 경략이 단행됐다는 것이다. 신라를 물리치고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사를 서쪽으로 이동해 고해진(古奚津·전남 강진)에 이른 목라근자가 심미다례(沈彌多禮·신미국) 등 영산강 유역 일대 국가들을 도륙(정복)했다는 게 신공기 49년조의 내용이다.

신공기 49년조는 일본사학자들의 수정 연대로 근초고왕 24년(369)에 해당한다.

영산강 유역 공격에는 근초고왕과 태자 근구수도 함께 참전하는데, 노 교수는 한성백제가 4세기 중반쯤 심미다례 세력을 정복해 영산강 유역을 영역으로 편입한 사실을 나타내주는 사료로 이해했다.

◇ 금산백령성 [錦山栢嶺城]

충남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 둘레 약 2645m. 충청남도 기념물 제83호.

이칭별칭은 백령산성(栢嶺山城)이다.

크기(높이, 길이, 둘레, 깊이) 둘레 207m 소재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건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제83호 문화재 지정일 1990년 5월 24일

백령성은 금산군 남이면 역평리와 건천리 사이에 있는 해발 438m의 성재산(城在山)의 백령(栢嶺 : 일명 잣고개) 정상부를 감싸면서 축성된 백제 말기의 테뫼식산성이다.

백령성은 ‘백령산성(栢嶺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남동쪽 성벽은 정상부 가까이를 지나고 있고, 북쪽 성벽은 약간 내려와 있어 전체적으로는 남고북저(南高北低)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207m인데, 동벽 50m, 서벽 50m, 남벽 70m, 북벽 37m이다.

남벽에 비해 북벽의 길이가 짧기 때문에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사다리꼴이다. 동벽은 모두 유실되었지만, 나머지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여 성벽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충청남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백령성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토층은 단일 문화층이며, 유물은 백제 말기까지의 유물들만이 출토되었을 뿐 이후 시기의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남문과 북문, 목곽시설 내에서 조사된 토층에는 불탄 흔적과 목탄 및 탄재들이 확인되어 화재를 확인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백령성은 백제 말기까지 단기간 동안 사용된 것으로 보이며, 어느 시점에 이르러 화재와 함께 각종 시설물들이 소실되면서 성의 기능도 폐쇄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내용

백령성은 2003년 2월에 정밀 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이것을 바탕으로 같은 해 8월에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2004년에 1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는 백령성 내부를 포함한 남벽 구간 일대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남문, 보도(步道)시설, 토광유구 3기, 원형 주공(柱孔), 목곽(木槨)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또한 2005년에는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는 북벽 구간 일대를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여 북문지(北門址)와 치(雉)를 확인하였다.

성벽은 기저부를 생토층까지 50㎝ 굴착하여 기저부를 조성하였으며, 성돌은 길이 40∼50㎝, 넓이 20∼25㎝의 것이 중심 크기를 이루고 있다. 현재 잔존하고 있는 성벽의 높이는 외벽 7.6m, 내벽 2.2m 정도이며, 내외벽의 폭은 4m 내외이다.

성벽과 관련한 부대시설은 치 1개소와 성문 2개소가 있다. 치는 북서벽 모퉁이 성벽구간에 돌출되어 있는데, 평면 형태는 길이 6.4m, 넓이 1.1m로 양쪽변이 길쭉한 세장방형이며, 잔존높이는 4.2m 정도가 남아 있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이 설치되었다. 남문은 현문식(懸門式) 즉 다락문식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북문은 대부분이 훼손되어 측면 및 바닥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이밖에 성내 부대시설로는 보도시설, 구들시설, 목곽시설 등이 있다.

유물은 기와·토기·철기·목기 등이 출토되었다.

기와는 대부분이 삼국시대의 백제 기와편들이다. 이 가운데는 명문(銘文)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印章瓦)가 출토되었는데, ‘이정(순)신 정사와(耳停(淳)辛 丁巳瓦)’, ‘무오와 이정(순)신(戊午瓦 耳停(淳)辛)’, ‘율현병진와(栗峴丙辰瓦)’ 등이 있다.

토기와 철기는 대부분이 편들로서 성내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삼국시대 말 백제 토기로 판단되고 있다.

특징

백령성은 금산군의 서남쪽에 치우친 산간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645m의 오대산과 해발 878m인 대둔산에서 뻗어 있는 높은 산봉들로 인해 주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없다. 대체로 산성은 주변 일대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축조하는데, 백령성은 일반적인 산성의 입지와는 다르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백령성의 문지는 현문식 구조인데, 이것은 주로 신라 산성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백제 산성에서는 보고된 예가 없다.

또한 치도 백제 산성에서는 거의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의의와 평가

백령성은 산간 협곡통로에 위치하여 주변으로 연결되는 능선 일대를 장악하면서 교통로를 차단하고, 백제 중앙과 동계(東界)의 주현(州縣)을 연결하는 길목을 감시·차단하는 관문(關門)과 같은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낙동강유역의 가야세력과 연결되는 신속한 이동 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거점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백령성이 위치한 교통로는 신라의 백제 침공로 가운데 하나인 탄현(炭峴)으로 통하는 주요 통로로 주목되어 왔다.

따라서 금산지역은 신라에게는 백제 침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는 요충지였으며, 백제에게는 내륙 깊숙한 곳에서 신라를 방어하는 전초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지정학적·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와 함께 백령성은 다양한 시설과 유물이 확인되어 백제 산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명문이 찍힌 다수의 인장와가 출토되어 문자기록이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금산백령성 [錦山栢嶺城]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하에 만들어진 목조구조물은 주로 백제에 편중되어 있으며 공주 공산성, 대원 월평동, 금산 백령산성, 대전 계족산성, 부여 궁남지, 이천 설성산성 등이 남아 있다.

고모산성 지하저장고는 발굴과정에서 나온 토기나 유물로 보아 자비왕 재위기에 해당하는 5세기 중반 건축물로 추정되는데 이는 백제의 지하 목조구조물보다 시기적으로 앞선 것이다.

[출처] 삶의 지혜, 우리나라의 지하공간|작성자 지구컨트웍스

백령산성은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건천리 일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해발 400m의 능선 일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수계에 의해 상·하류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침식계곡을 따라 사방으로 교통로가 발달되어 있어 교통의 요지라 할 수 있다.

백령산성은 출토유물이 거의 예외 없이 사비 도읍기의 백제(536-660년)에 속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백제말기에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그 멸망과 함께 용도폐기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시대 목곽수조는 공주 공산성, 대전 월평동유적, 순천 검단산성, 금산 백령산성, 부여 부소산성 남쪽 기슭 등에서 발굴됐으며 모두 백제시대의 것이었다.

그 중 대전 월평동의 목곽시설은 백령산성의 것과 거의 같은 형식이었다.

적벽강, 금강의 또 다른 이름

전북 장수군 수분리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전북 무주와 진안을 거쳐 충북과 충남을 적시며 흐른다.

뜬봉샘에서 충남 서천의 금강하구언까지 장장 402km의 길고 큰 물줄기를 형성하면서 흐르는 것.

금산의 비경 적벽강을 아시나요.

금강은 충청남북도를 흐르면서, 본 이름 ‘금강’ 외에 두 가지 이름을 더 갖는다. 충남 금산의 적벽을 적시고 흐르면서 ‘적벽강’으로, 충남 부여의 부소산을 적시고 흐르면서 ‘백마강’으로, 금강은 그렇게 충청도를 에두르고 휘돌아 흐르면서 그 지역의 자연과 역사를 끌어안는다.

전북 무주를 지나 금산 부리면의 중심부를 감입곡류 하는 금강은 부리면 수통리에 이르러 ‘적벽강’으로 강 이름을 바꾼다.

붉은색 바위벽을 뜻하는 적벽(赤壁). 그 아래 적벽을 적시며 강이 흐르니 그 강의 이름을 ‘적벽강’이라 예부터 이름 짓고 풍광을 즐겼다.

30여 미터 높이의 깎아지른 기암절벽 아래 도도히 흐르는 적벽강은 적벽과 마주보는 자리에 물놀이하기에 좋은 자갈밭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어서 여름에 이 강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적벽은 부리면의 최고봉 성주산(624m)이 남쪽으로 줄기를 뻗어 내리다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양각산(566m)을 일구고 금강으로 자락을 급히 내려 기암절벽의 절경 또한 일군다.

산의 남서쪽 수통리 강가의 거대한 기암절벽인 적벽을 비롯하여 그 위쪽 이름 없는 기암절벽과 함께 양각산의 ‘한바위’ 기암절벽까지 세 개의 기암절벽이 금강과 어우러져 수려한 경관을 그려내고 있다.

인삼을 팔아 조선시대 최고의 거부였던 임상옥을 드라마한 ‘상도’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내비게이션 명칭검색 : 적벽강

주소검색 :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적벽강로 697 일원

가는 길 안내

대전통영고속도로 금산IC 통과 후 금산방면 우측도로 이용 계속직진하고 1.4km 전방 창평 교차로에서 적벽간/부리 방면으로 좌회전, 다시 210m 전방에서 무주/부리 방면으로 좌회전 후 3.2km 전방에서 좌회전하면 1.32km 전방 삼거리에서 11시 방향으로 계속 직진하면 강변길로 이어진다.

중간에 처음 다리가 나오면 건너지 말고 우회전 후 좌회전을 하면 수통2리 앞에 놓여 있는 수통대교를 건너고 계속 진행해서 적벽대교를 건너 우측으로 진입하면 목적지다.

여행팁

첩첩산중에 금강 상류인 적벽강이 휘감아도는 곳에 자리를 잡은 수통마을은 휴양 및 건강 체험이 가능한 자연 생태계가 살아있는 마을이다.

강에는 일급수 어종인 쏘가리, 꺽지, 빠가사리, 모래무지, 부구리, 쉬리, 다슬기 등이 살고 있고 강변에는 억새밭이 장관이다.

도시민의 휴양과 캠프장, 마을공원, 인삼약초 효소체험관, 인삼약초탕, 적벽강레프팅 등 다양한 건강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숙박시설 이용도 가능하다.

다음은 금산 8경이다.

12폭포

금산군 남이면에 있는 해발 648m의 성치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폭포가 되어 내려오는 12폭포는 폭포 자락에 크고 작은 소(물이 고이는 곳)이 위치해 있어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다.

천내강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저곡리 일대를 흐를 때 붙여지는 금강의 별칭으로 임진왜란 때 유적과 기암 절벽으로 유명한 곳이다.

천내강

해발 648m의 성치산 성봉에서 발원한 계곡이 폭포를 이루며 흐르다 봉황천과 합류하기까지 3km. ‘무자치골’이라 불리고 있는 계곡은 여름철 등산에 더없이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마을 앞에 봉황천이 흐르는 구석1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내를 건너 등산로 입구에 들어서면 계곡을 지그재그로 건너기도 하면서 계곡을 끼고 등산을 하게 된다. 성치산 성봉까지는 6.5km. 등산로의 절반이 계곡과 함께 한다.

등산을 하고 나서 계곡을 즐긴다면 더없이 좋지만 그마저 귀찮으면 종일토록 계곡을 떠나지 않으면 그만. 계곡에서 숲과 옥수의 청량함 속에서 여름 휴양을 마음껏 즐기며 더위를 잊을 수 있다. 특히 무자치골은 12폭포로 더 유명한 계곡이다. 계곡을 오르다 처음으로 마주하는 20m의 높이의 폭포를 시작으로 크고 작은 폭포가 연이어 계곡의 곳곳을 수놓고 있다.

계곡에 형성된 12개의 폭포는 물이 바위, 또는 바위사이로 떨어지는 곳에 웅덩이가 형성되어 있으면 폭포로 인정. 폭포 아래 형성된 크고 작은 소는 깊지 않거나 적당히 깊어 어른 아이 모두가 물놀이를 안전하게 즐길 수 있다.

천내강

이곳이 금산의 명승지이며, 사계절 끊이지 않고 관광객이 찾아드는 천연의 모습을 간직한 곳이다.

천내강은 제원면 저곡리와 개티 건너편의 천내강 사이에 있는 금강상류로, 담수어가 많이 잡히며 천내리 강가에는 고려시대 유물인 용호석(龍虎石)이 280m의 간격으로 서 있고, 강가에는 임진왜란 당시 금산군수로 적을 막다 이곳에서 순국한 권종의 전적비가 옛 격전지에 서 있어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한다.

저곡리 갯벌 옆산은 그 이름이 봉황대(鳳凰臺)로 강을 향해 높이 솟아 있어, 옛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았다. 이 산마루에 봉황대라는 정자가 있어 찾는 사람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고 저곡리 뒷산에는 임진왜란 때 쌓은 성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대둔산 금산의 산

충남과 전북 두 도의 도립공원 대둔산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다.대둔산(878m)은 충남 금산군 진산면과 논산시 양촌면, 완주군 운주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겹겹의 암봉으로 이루어진 이 산은 산 자체의 경치도 빼어나지만 주봉인 마천대와 제 2봉인 낙조대의 경관이 빼어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암벽등반 코스가 있어서 산악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3개 시군에 걸쳐있는 이 산의 명소가 3개 시군에 공히 분산되어 있는 점 또한 재미있다.

완주군 운주면의 명소는 대둔산 케이블카와 마천대가 그것이고, 논산시 양촌면의 명소는 대둔산 수락계곡이다.

금산군 진산면의 명소는 어디일까? 천년고찰 대둔산 태고사와 대둔산의 제2봉 낙조대와 함께 암봉과 암벽으로 이루어진 대둔산의 산세를 가장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는 생애대(735m)가 그것이다.

금산군의 대둔산 등산코스는 태고사길을 오르다보면 태고사 광장에 이르기 전에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는 광장이 위치하고 있는 곳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화장실이 설치된 광장에 주차를 하고 산행을 시작하여 장군약수터를 경유하여 생애대에 오르고 다시 낙조대를 향하여 오른 다음 태고사를 경유하여 원점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진악산

금산 사람들의 가슴속에 금산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자리한 금산의 진산이다. 진악산(732m)은 금산군 금산읍과 남이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금산읍의 서남부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산이다.

충남의 산 중에 세 번째로 높은 이 산은 충남의 최고봉 서대산(904m), 민족의 영산 계룡산(845m)에 이어 그 높이와 산세를 자랑한다.

일찍이 계룡산, 대둔산, 칠갑산, 서대산 등 충남에서 내로라하는 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명산반열에 오른 이 산은 우리나라 최초 인삼재배지인 개삼터를 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진악산은 또 산의 정상부에 바위가 많아 능선을 타면서 막힘없는 시야에 매료되기도 하는 산이다. 보석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진악광장까지(또는 그 반대) 종주를 하면 다양하게 다가오는 진악산의 풍광을 즐길 수 있다.

금산읍 시가지와 그 언저리 천태산, 서대산, 갈기산 등 주변 명산들이 가까이 조망되는 풍광은 진악광장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바위능선을 타고 오르면서 정상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와 산행의 묘미를 한껏 즐길 수 있는 산이다.

특히 정상에서 정상보다 5m 높은 737봉을 지나 도구통바위까지의 바위능선을 타고가면 금산이 자랑하는 개삼터가 전경으로 다가오는가 하면 남이면의 산군들 너머 천등산과 대둔산이 우뚝 솟은 절경과 마주치기도 한다.

서대산

충청남도에서 가장 높은 902m의 산으로써 한국 100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히는 산이다.

서대산은 우람하고 홀로 우뚝하여 산상이 좋지만 바위봉우리와 푸른 숲이 어우러져 경관도 매우 아름답다. 서대산(904m)은 금산군 추부면과 군북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금산읍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산이다.

충남의 최고봉으로 한국의 100대명산 중의 하나인 이 산은 큰 산이면서도 주변 산과 줄기가 이어지지 않고 섬처럼 육지에 우뚝 솟아있어 비래산(飛來山)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진서대산의 매력 포인트는 기암절벽. 동서남북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더라도 산의 곳곳에서 울창한 숲을 뚫고 울퉁불퉁 기암절벽이 튀어나와 있는 이 산은 뭇사람을 유혹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능선부는 말할 것도 없이 산 전체에 걸쳐 기암절벽이 발달하여 수많은 암봉과 암벽, 기암을 품고 있는 산으로 능선부의 어느 암벽이나 기암에 오르더라도 장쾌한 풍광이 유감없이 펼쳐진다.

신선바위, 북두칠성바위, 장군바위, 탄금대, 석문 등과 함께 무명의 기암절벽이 능선을 수놓고 있는가 하면 용바위, 마당바위, 촛대바위 등과 함께 수많은 무명의 기암괴석이 숲 속에 숨어있어 산의 어느 곳을 오르더라도 산행의 묘미가 돋보이는 산이 서대산이다.

산행기점은 서대산드림리조트 주차장을 비롯해 흥국사 등을 기점으로 해서 오를 수 있다. 기타 기점으로는 추부면 성당리, 군북면 상곡리의 천수동계곡이 있다.

귀래정

금강 상류의 맑고 푸른물이 부리면 평촌리와 신촌리 사이에서 여울을 이루고 그 밑으로 내려가 산 밑을 감돌면서 잔잔한 호수를 이룬다.

강 건너 신촌리 쪽에는 마을 밖에 3ha나 되는 넓은 송림(松林)에 50년 생 이상의 노송이 사시사철 울창한 숲을 이루어 별천지를 형성하였으나, 이젠 농경지 조성으로 벌채하여 송림은 흔적조차 볼 수 없게 되었다. 이곳이 유명한 신촌 송림이니, 송림 밖에는 새알같은 강돌이 곱게 깔려 있고, 강물에 연하여 금모래밭이 널려 있어 여름철 강수욕, 일광욕 장소로, 가족과 함께 찾기에 적당한 곳이다.

강물은 산 밑을 감돌며 넓고 깊은 호수를 이루어 뱃놀이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지난 날에는 충남·전북· 충북의 3도지사가 호화로운 뱃놀이를 했다고 하며, 인근 주민들이 그 시중을 드느라고 며칠간 총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강물에 빠져 있는 듯 내려앉은 "동그란산"에는 지난날에 귀래정(歸來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놀이로 찾아드는 풍류객들로 붐볐으며 이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손님을 많이 치뤄 이 정자를 불태웠다는 전설이 남아 있을 뿐 지금은 그 빈터만 남아 있다.

국사봉 금산의 산

국사봉은 국수봉(國帥峯 또는 國事峯)이라고도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국시봉, 구시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국사봉은 국수봉(國帥峯 또는 國事峯)이라고도 하는데 지방에 따라서는 국시봉, 구시봉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국수봉이란 부근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서 국수당(國師堂 또는 國師神當)을 차려놓고 하늘에서 내리는 국수신(國帥神)을 모시는 곳으로서 산신당(山神堂), 서낭당(성황당=城隍堂)과 함께 동신신앙의 하나인데 1950년쯤 이곳 정상의 네모난 큰바위밑에서 그릇조각, 쇠로 만든 말(馬), 배(船)의 모형과 금가락지가 출토되어 민속신앙과 관련한 국수신당이 있었으리라 짐작케 한다.

참고로 말이나 배는 신의 상징 또는 신(神)이 타고 다니는 물건이라 신당에 비치한다고 한다. 한편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뒤 북악산과 남산꼭대기에 국수당을 지어 서울의 수호신사로 활용하였다고 하며 국수신은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섬겨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국수봉은 전국적으로 보면 곳곳에 산재하여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곳 국수봉 정상에 1960년대 후반 육군 통신초소가 설치되어 1980년대 초반까지 5~6명의 현역군인이 주둔한 바 있고, 1970년대에는 답박굴 뒤 2부~5부 능선 편평한 부분에 예비군 훈련장이 설치되어 10여 년간 운영되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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