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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월평공원 논란에 앞서 월평산성 논의에 나서야
산성의 도시 대전시 ‘월평산성’
2018년 10월 21일 (일) 13:31:54 장영래 기자 adjang7@hanmail.net
   
【대전=코리아플러스】장영래 기자 = 산성의 도시 대전시가 월평공원 노란에 앞서 월평산성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이는 최근 고등학교에서 지역의 문화를 찾아 나서는 활동들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대전=코리아플러스】장영래 기자 = 산성의 도시 대전시가 월평공원 노란에 앞서 월평산성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이는 최근 고등학교에서 지역의 문화를 찾아 나서는 활동들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제2회 대전산성구비九飛 9城團탐사..1城團 안산동산성을 찾아서..(안산동산성 案山洞山城). (3월 17일)2城團 적오산성을 찾아서..(적오산성 赤鰲山城). (3월 31일)3城團 월평동산성을 찾아서..(월평동산성 月坪洞山城).2018-04-14 ( 둘째 토요일 / 비 )대전산성구비九飛3城團(월평동산성) 탐사.[출처] 2018-04-14 / 대전산성구비九飛 3城團(월평산성) 탐사..|작성자 청마 등이다.
 

   
【대전=코리아플러스】장영래 기자 = 산성의 도시 대전시가 월평공원 노란에 앞서 월평산성 논의를 먼저 해야 한다는 여론이다. 이는 최근 고등학교에서 지역의 문화를 찾아 나서는 활동들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구봉고등학교.

월평동산성[月坪洞山城]은 대전 서구 월평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 둘레 약 710m. 대전광역시기념물 제7호.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자연석의 외면을 맞추어 제일 높은 봉우리를 기점으로 능선을 따라 축조했다.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에서는 백제 뿐만 아니라 고구려 토기도 출토됐다. 이는 고구려가 5세기 후반경 대전지역까지 진출했던 사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안성 도기동산성, 청원 남성골산성 등 5세기 고구려의 남진 경로로 추정되는 곳에서도 고구려의 유물이 출토돼 월평동산성 일대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던 사정도 점차 규명되고 있다. 이칭별칭은 유성산성/월평산성으로 건립시기·연도 삼국시대 백제가 축조했다. 크기는(높이, 길이, 둘레, 깊이) 둘레 745m 규모(면적) 약 3만3015㎡ 이다. 소재지는 대전광역시 서구 월평동 산12-2에 위치하고 있다. 관리자는 대전광역시로 문화재 지정번호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7호로 문화재 지정일은 1989년 3월 18일이다.

대전시 서구 월평동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인 월평산성은 갑천 동안의 해발 138m 구릉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대전에서 유성으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공주로 가는 옛길이 지나가는 곳이다. 산성에서는 서쪽으로는 유성 일대가 동쪽으로는 대전 시내 일대가 조망된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됐으나 문지와 석축의 흔적은 지표상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문지는 모두 3개소로 추정된다. 동문터의 너비는 500㎝이고, 서문터는 너비 360㎝이며, 북문터는 너비 300㎝이다. 북문터 부근에는 성에서 가장 낮고 평탄한 곳이 있는데 이곳에 저수나 집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산성을 정밀측량한 도면이 없어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대략적으로 전체 둘레는 약 745m(또는 710m, 680m) 정도로 파악된다. 성내부에서는 백제토기편이 수습되어 백제가 축조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2001년에 남벽 일부 구간과 고대지 일대가 발굴됐다.

월평동산성이 위치한 곳은 백제의 노사지현(奴斯只縣)이 있었던 곳이다. 그 때문에 월평동산성을 노사지현의 현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백제부흥군이 활동했던 내사지성(內斯只城)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근에 있는 구성리산성을 노사지현성과 내사지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발굴 조사된 월평동산성의 서벽은 기초부를 진흙과 석재를 섞어 다져서 조성했다. 먼저 폭 14m 규모로 작은 돌과 진흙을 섞어 다지고 다시 그 위로 폭 15m 정도 다듬지 않은 큰 돌과 진흙을 섞어서 다져 올렸다. 기초부 위에 조성된 성벽은 토축부와 석축부로 구분되는데 토축부는 성벽 내부에 판축해 조성했으며 여기에 기대어 외벽쪽은 석축을 했다. 외벽 축조에 사용된 면석은 대부분 화강암을 정방형에 가깝게 치석했다.고대지는 산성의 남서 모서리부분에 있다. 전투시 지휘소인 장대지를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축조한 것이다. 풍화암반 위에 마사토와 회갈색 사질토를 1∼5㎝ 두께로 켭켭이 다져 올려서 조성했다. 높이는 480㎝, 하단 폭은 750㎝, 상단 폭은 300㎝ 정도였다. 월평동산성은 아직 발굴조사가 일부 지역에 제한적으로 이루어져 축조시기와 성격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축조시기를 대략 7세기 경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월평동산성 남벽에서 남동쪽 약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해발 약 135m 구릉이 있다. 1994년 이곳에 정수장이 확장되면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백제시대에 축조했던 목책, 방어호, 석축성 , 목곽저장고, 신라 석곽묘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6∼7세기 백제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월평동유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방어와 저장을 위한 시설로 보아 방어시설이 분명하다. 아직 월평동산성과 월평동유적이 하나로 연결된 산성인지 아니면 각각 다른 시기에 사용된 산성인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이것을 하나의 산성으로 보아 이 두 유적을 합쳐서 월평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출토 유물로 보아 먼저 월평동유적이 만들어 지고 이 보다 좀 늦은 시기에 월평동산성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월평동산성이 월평동유적에서 확대된 것인지 월평동유적에서 축소하여 산성을 다시 축조한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글은 참고문헌『대전 월평동 산성』(충청문화재연구원, 2003)『대전 월평동 유적』 (국립공주박물관·충남대학교 박물관, 1999)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로고 http://www.aks.ac.kr [네이버 지식백과] 월평동산성 [月坪洞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을 참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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