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철도광장에서 고(故) 김재현 기관사 등 287명의 철도 영웅 추모

【대전=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대전 동구는 지난 달 19일 대전역 동광장에 우치한 호국철도광장에서 6.25전쟁 당시 희생한 철도유공자 287명의 제69주기 추모제를 거행했다.

【대전=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대전 동구는 지난 달 19일 대전역 동광장에 우치한 호국철도광장에서 6.25전쟁 당시 희생한 철도유공자 287명의 제69주기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날 행사는 유족 및 주요기관 단체장, 보훈단체 회원, 미8군 관계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식전행사로 뮤젯트리오의 아코디언 연주와 6.25 참전 기관사 영상을 상영한 뒤 개식선언과 국민의례, 전투약사보고, 헌화 및 분향, 주요 내빈들의 추모사와 추념사 순으로 진행됐다.

이어 유족대표로 고(故) 김재현 기관사의 아들 김제근씨가 추모의 글을 낭독했으며 극단 떼아뜨르 고도의 공연이 이어졌다.

특히 계룡대 공군 의장대와 군악대가 이날 적극 지원에 나서 철도유공자 추모를 위한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

한편 추모제가 열린 7월 19일은 69년 전 6.25전쟁 당시 고(故) 김재현 기관사를 포함한 한국인 기관사 3명과 미 특공대원 33명이 미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 구출작전을 벌이다 장렬히 전사한 날이다.

다니엘 크리스티안(Daniel J. Cristian)미8군 행정부사령관은 추념사에서 “6.25전쟁 당시 나라와 국민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하신 철도유공자분들께 깊은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황인호 동구청장은 추모사에서 “철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이 현재의 대한민국을 만들었으며 287위의 숭고한 넋이 헛되지 않도록, 후손들에게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고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대전(大田)부근에서

-미 딘소장(少將) 포로로 잡히다

인민군은 오산, 평택, 조치원을 거쳐 대전을 우회하여 금산간의 도로와 대전 대구간의 도로를  차단하고 대전을 봉쇄했다.

부대들 간의 통신도 지휘체제도 잃은 미군은(1950.7.19.오후6)저항을 멈추고 총 퇴각하야 했다.

싸움다운 싸움 한 번 못하고 장갑차의 호위를 받으며 남쪽으로 후퇴하던 미군은 인민군 매복에 걸려 풍지박산 되었다

이로 인해 24단 병력 4000여명중 포로 1150명에 이르렀고, 사단장 딘 소장은 머리에 부상을 입고 패잔병이 되어 혼자서 적진을 방황해야 했다.

빛나는 별 두개를 양어깨에 붙이고도 어디가 남쪽이고 어디가 북쪽인지도 모르고 삶과 죽음의 목마른 논두렁에서 미끄러워 넘어지고 배고파 넘어지며 지냈다. 825일 어느 농민의 신고로 少將은 인민군의 포로가 되었다.다시 보는 한국전쟁 중 참조

다음은 [중도일보 보훈의 달 특집] 6.25 최후의 보루는 대전 (사진과 기사=중동일보 참조)

2.딘 소장 구출작전, 0720 대전으로
1. 미카3-129 6.25전쟁 포화속으로 3. 철도인 최초 공훈자 김재현 기관사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윌리엄 딘 소장이 이끄는 미8군 제24사단이 가장 먼저 한국에 도착했다. 북한의 맹공으로 이미 서울이 점령된 상황이었다. 제24사단이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지구로 대전을 꼽았다. 대전을 사수해야만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해 7월18일 진격해오는 북한군과 처절한 3일간의 전투가 대전에서 시작됐다. 공주, 논산, 유성… 점점 퇴각하는 미군은 최후의 보루라는 심정으로 대전 갑천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전쟁의 한복판에 딘 소장과 미카가 있었다.
 
▲6.25전쟁당시 대전전투를 지휘했던 윌리엄 딘 소장의 모습.
 
▲6.25전쟁당시 대전전투를 지휘했던 윌리엄 딘 소장의 모습.
 

대망의 7월20일 새벽, 서대전 네거리에 주둔해 있던 딘 소장과 미군은 3.5로켓포와 바주카로 북한군의 탱크를 공격했다. 소련제 전차 등 총 14대를 파괴했지만 북한군의 맹공은 상당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달은 딘 소장은 “사단은 옥천으로 이동하라” 마지막 무전을 대전 선화동에 위치한 당시 충남도청사에서 보낸다. 곧 대전시내를 빠져나가기 위해 지프차에 올랐지만, 혼전 속에서 딘소장이 탑승한 차량은 분대와 떨어져 길을 잃고 만다.

딘소장의 고난은 여기서 시작됐다. 길을 잃은 딘소장은 생과 사를 넘나들며 전북 진안까지 내려갔지만 그곳에서 한두규라는 마을 주민이 딘소장의 행방을 인민군에 밀고했다. 6.25전쟁의 포화속에서 대전전투를 진두지휘하던 군인에서, 길을 잃은 미군으로 그리고 결국 인민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딘소장이 인민군에게 붙잡히자 딘소장 구출작전에 투입됐던 미카3-129. 현재 대전현충원에 있다.
 
▲딘소장이 인민군에게 붙잡히자 딘소장 구출작전에 투입됐던 미카3-129. 현재 대전현충원에 있다.
 
 

미카의 등장 “작전명 딘 소장을 구출하라”

6.25 당시 딘소장의 이야기에 미카3-129가 빠질 수 없다. 인민군의 포로가 된 딘소장 구출작전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영동으로 퇴각한 미군은 급하게 딘소장을 구출하기 위해 팀을 꾸린다. 증기기관차 미카3-129와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조사, 현재영 보조조사를 코레일을 통해 차출하고 미군 결사대 30명을 태우고 대전역으로 향했다. 이원역에서 옥천역으로 그리고 세천을 지나 대전역에 당도했다. 역에 멈춰선 미카에서 미군들이 내려 딘소장을 찾으러 나섰다. 당시 충남도청사에서 마지막 무전이 있었고 퇴각하던 부대와 떨어진 지점이 대전역 인근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딘소장은 없었다.
 
▲옛 구정리터널에는 6.25당시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총격 흔적이 남아있다.
 
▲옛 구정리터널에는 6.25당시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총격 흔적이 남아있다.
 

30분의 수색을 마치고 미카는 돌아가기 위해 경적을 울린다. 대전역에서 세천역을 지날 무렵 또다시 매복해 있던 인민군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탕탕탕!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알들, 결국 이곳에서 김재현 기관사는 사망했고, 이어 현재영 보조조사마저 총상을 입고 쓰러졌다. 홀로 남은 황남호 본무조사의 필사적인 운전으로 세천역을 빠져나왔다. 북한군의 공격은 당시 구정리 터널에서 주로 이뤄졌는데 현재까지도 총과 포탄에 맞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딘소장 구출작전으로 기관사 2명이 사망, 미군은 32명이 사망했다. 
▲보문산에 있는 대전지구 전적비. 딘소장이 포탄을 들고 북한군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중도일보 DB
 
▲보문산에 있는 대전지구 전적비. 딘소장이 포탄을 들고 북한군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중도일보 DB
 

전쟁이 휴전되자 딘소장은 남한으로 풀려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육군 무공 훈장을 받았다. 그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무려 66년이 흘렀지만 딘 소장은 여전히 세계 전쟁영웅으로 꼽힌다. 그가 고군분투하며 미군들과 지켜낸 대전전투로 북의 거센 남침을 막아냈고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도화선이 되었음은 모두가 인정하는 공로다.

대전 보문산에는 대전지구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전적비는 딘 소장이 로켓포로 북한군을 공격하는 모습이다. 보훈의 달 두 번째 시리즈를 준비하면서 서대전 네거리와 대전역, 세천역과 구정리 터널을 답사했다. 아주 자세히 보면 전쟁의 포화는 여전히 남아 있다. 세월도 미처 지우고 감추지는 못했더랬다.

길을 잃고 포로가 되는 과정에서 딘소장의 철모가 세천지역 어딘가에 떨어졌다는 기록을 보았다. 주인을 잃은 철모는 과연 어디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이해미 기자

 

저작권자 © 코리아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