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문화체육관광부는 정부포상업무지침에 따라 故 사애리시(일제강점기 미국선교사) 정부포상 후보자의 공적을 붙임과 같이 공개, 의견을 수렴한다.

참고로 동 대상자는 향후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수상자로 선정되거나 탈락될 수 있다.

공개검증은 오는 6일 전자우편(주소 : lee4754@korea.kr)으로 의견을 제출하면 된다.

기타 자세한 사항은 문화체육관광부 종무2담당관(☎044-203-2323)로 문의하면 된다.

공개검증 대상자 명단은 앨리스 H. 샤프(Alice H. Sharp)(1871生)미국 감리교 소속 선교사故 사애리시(일제강점기 미국선교사)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에서 38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공주영명중ㆍ고등학교 전신인 명설학교 등 9개 여학교와 7개 유치원 설립 및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편입 등 독립의식 고취 및 교육발전 등 대한민국 국가발전에 기여했다.

다음은 코리아플러스 2019년 11월 21일자 공주영명고등학교 학교신문 1면에 실린 임연철 전 서초문화예술회관 관장의 3․1절에 동상으로 살아난 사애리시(史愛理施)라는 제목의 글이다.

【공주=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본명은 앨리스 해몬드(Alice Hammond). 1871년 캐나다 동쪽 끝 노바스코시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왔다. 뒤따라온 뉴욕 선교훈련원 동창 로버트 샤프(Robert Sharp)와 1903년 이화학당 본관에서 결혼, 이름이 앨리스 H. 샤프로 바뀌었다. 남편 로버트는 충남지역 선교 중 발진티프스에 전염돼 1906년 순직했으나 그 녀는 1939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39년을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 지방에서 살았다. 그 사이 성(姓) 샤프는 사(史)씨가 됐고 이름 앨리스는 애리시(愛理施)가 됐다.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당시 사람들은 ‘사 부인’으로 불렀다. 

본명은 앨리스 해몬드(Alice Hammond). 1871년 캐나다 동쪽 끝 노바스코시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왔다. 뒤따라온 뉴욕 선교훈련원 동창 로버트 샤프(Robert Sharp)와 1903년 이화학당 본관에서 결혼, 이름이 앨리스 H. 샤프로 바뀌었다. 남편 로버트는 충남지역 선교 중 발진티프스에 전염돼 1906년 순직했으나 그 녀는 1939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39년을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 지방에서 살았다. 그 사이 성(姓) 샤프는 사(史)씨가 됐고 이름 앨리스는 애리시(愛理施)가 됐다.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당시 사람들은 ‘사 부인’으로 불렀다.

1900년 대 초반 충남에서 살았던 한 여선교사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거주했던 공주 선교사 고가(古家) 옆에 뜻 깊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 동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남편 로버트,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함께⋯. 지방에서 활동했던 탓에 사부인은 동시대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부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유관순 열사의 전기에도 나올 만큼 개화기 한국 여성 교육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사부인이 없었다면 유관순 열사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할 만큼 짧은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서 사부인은 중요한 존재였다.

1902년 12월 유관순 열사가 태어날 때 현재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당시 지명은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였다. 이미 이곳에는 1898년 유 열사의 친척 어른이었던 유빈기(柳斌基)가 세운 기도처가 있었고 발전해 교회가 되자 교회 마당은 어린 유관순 열사의 놀이터였고 배움터였다. 1904년부터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와 여성교육에 발 벗고 나선 사부인이 선교 차 들른 지령리 교회(현 매봉교회)에서 어린 유관순을 만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시 선교사 보고서에도 ‘치릉이(chi-reung-i)'교회로 표기된 ’지령리 교회‘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여러 차례 지령리 교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어린 유관순이 똑똑하고 신앙심이 있는 것을 확인한 사부인은 자신이 세운 공주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켜 2년을 가르친 후 1916년 이화 학당 보통과에 교비장학생으로 입학시켜 주었다.

매년 봄 사부인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열렸던 여성 선교사 연차 총회에서 보고한 기록을 보면 그녀는 공주 강경 논산 홍성 등 충청남도 일대에 20개 가까이 여학교를 세워 여성의 교육을 통한 개화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작은 규모로 여학당을 세웠지만 그나마 재정난으로 교사 월급을 못줘 애타하는 모습과 미국 교인들에게 기부를 부탁하는 모습이 편지와 보고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일제의 관립학교들이 지역 곳곳에 세워지며 여학당은 점차 사라졌지만 공주의 영명 여학당은 오늘날까지도 영명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한국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이 된 노마리아, 감리교 최초의 여성목사 전밀라, 철도간호학교를 세웠던 박한나 등이 그녀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일제강점시대 한국여성 개화에 헌신한 공적을 기려 1939년 귀국에 앞서 1938년 9월에는 ‘사애리시 선교기념비’가 영명고 교정에 세워지기도 했다. 80년 전 세워진 기념비만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던 공주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발기해 미국 뉴욕과 LA지역의 교인들이 동상건립기금으로 3억 여 원의 성금을 모았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가 주도해 3월 1일 오후에 제막되는 동상은 사부인과 남편 로버트, 어린 유관순 열사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동상으로 함께 있는 모습처럼 1910년 한일강제 합병이 이뤄지는 시기를 전후해 사부인과 유관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이뤄진다. 나라가 평온한 시기였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정치, 사회, 여성운동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부인이 유관순에게 준 가르침은 ‘나라와 의(義)’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는 ‘열사 유관순’이다.

귀국한 사부인은 선교사 양로원에서 1972년 101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건강하게 장수했다. 특히 양로원에서 치러진 100세 생일파티는 한국에서 함께 생활했던 후배 선교사들의 축하 속에 진행됐다고 당시 현지 신문인 스타뉴스는 전하고 있다. 후배 선교사였던 안나 채핀(Anna Chaffin)은 사부인의 한국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23년 미국의 친구 몇 명이 차를 사줘)포드자동차를 타게 된 후 사부인은 갈 수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가끔은 정말 멀고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 그 곳 사람들과 만나고 봉사하기를 즐겼다. 특히 그녀는 한국의 산을 뒤덮은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하얀 색 라일락꽃의 풍경을 정말 좋아했다. ⋯그곳의 모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다.”

동상의 주인공 사부인이 좋아했던 진달래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던 유관순 열사의 정신도 함께 피어나기를 100주년 3.1절에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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