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6.25 70  돐을 맞고 있다.

지금세대들은  모른다. 전쟁 후유증은 비참과 흉측 가난의 복합체이다. 수많은  지체 장애 상이용사와 거지 고아들의 천지였다. 초등학교시 양다리를 잃은 상이용사가 무릅부분에 고무를대고 엉금엉금 기어서 교무실을 거쳐 교장실을 들이 닥친다. 교장선생에게 구걸 하기 위해서다. 그모습이 무서워 아이들과 여선생들은 산으로 도망을 갔던 기억이난다. 오죽하면 돈없는 초등교장실에 구걸을 왔겠는가. 수많은 상이 용사가 목발을 짚고 농촌에 구걸을 왔다. 동냥이 소흘하면 곡식멍석을 뒤엎고 가는 일도 자주 있었다. 상이 용사들의 생존 수단이 없던 그 시대는 우리모두의 아픔 이었다. 팔을 잃은 분들은 의수 끝에 쇠갈고리를 끼우고 손가락을 대신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쟁 이후의 폐기물이나 잔유 물자들이 한국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드럼통을 잘라 자전거와 자동차 바디를 만들었다. 군용집차는 나중에 시발택시(지프형 택시)로 변했고  군용 GMC트럭은
뻐스와 화물차로 개조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든 버스를 타고 초등학교 졸업에행을 경주로 다녀왔다. 전쟁의 부산물은 근대산업의 기본조건을 제공했다. 본인의 집 후방50m 지점은 6.25 당시 대대급 이상의 전투부대야영지 였다 전쟁후 버려진 전투장비들은 모두 가정용 건축자재와 가재도구와 생활용품으로 변신했다. 대포의 장약탄피는 굴뚝과 물대기용 도관으로 이용되었다 . 큰 탄약통은 곡식보관함 으로 작은 탄약통은 약재나 귀중품 보관상자로 변했다. 통신선은 빨랫줄과 라디오 안테나 선으로 변했고 통신선 감개는 돋음으로 요긴했다. 철조망은 동네 빨래널이에 사용되었다. 철조망 지주대는 과수원 지주대나  담장 지줏대로 안성마춤이었다. 철모는 끈을달아 비료나 씨앗 그릇으로 사용되었다.

아낙네들의 물동이를 대신할 물통은 큰 탄약통을 개조해 두개로 짝을 맞추면 돈 안들고 멋진 물지개가  생긴다. 두레박도 군용통조림 큰 통으로 만들었다. 온통 생필품은 군용아닌 것이 없을 정도었다. 심지어 아이들 소풍용 물통도 군용 수통을 이용했다. 전쟁후 부산물이 생산과 산업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산업화의 공로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 60mm 박격포탄은 공병출신의 아저씨들의 손을 거치면 물고기 잡이 다이너 마이트로 변했다. 물속에서 폭발전 강뚝에서 기다리면 천지가 진동하는 굉음을 내며 터졌다. 지금에는 억만금을 주어도 그 위험한 짓을 할 사람이 없다. 먹거리가 없던시대 이기에 불법이지만 가능했던 시대의 모습들이었다. 실로  6.25는 민족전체로는 큰 비극 이었지만 일면으로는 산업화와 농촌 근대화에 다소 기여가 된면은  부정할 수가 없다. 6.25가 한국근대화에  도움은 되었지만 공정한 평가측면에서 보면 슬프고 아픈 추억이 너무 많다.

그러나 전쟁사실 너머의 애환과 서민들의 모습을 더듬어 보면서 새로운 자유통일의 미래를 준비한다면 우리 국민들에게
유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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