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철 코리아플러스 편집위원 겸 세계 여행작가

【서울=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강인철 코리아플러스 편집위원 겸 세계 여행작가

【서울=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더러는 젊은 늙은이도 있고 늙은 젊은이도 있듯이 세대차이란 서로 다른 것 일 뿐, 결코 틀린 것은 아니다. 서로의 다름을 품어 안고 포용과 상생의 모자이크문화를 이룬 자만이 역사의 승자였음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미풍양속을 삶의 가치로 여겼던 선대들의 생활덕목을 생각하면 하늘 같이 높고 바다보다 넓은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대를 이어 살아 왔건만 어찌하여 요즈음 일부의 사람들이 부모세대를 일러 변화를 모르는, 말이 통하지 않는, 잔소리나 하는 사람쯤으로 폄훼(貶毁)하고 있을까? 결코 지나온 과거를 소홀히 해서는 이니 되는 게 인생의 수레바퀴 아니던가?

해가 거듭될 수록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학입시가 그 때는 고3학년 말(末)이 되면 ‘대학입학자격고사’를 치렀고 이에 합격하면 전국 어디든 원하는 대학을 찾아가 본고사와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전기 후기에 3차까지 기회가 있어 학력 따라 물 흐르듯 진학했다. 그 젊은이들이 고국을 떠나 이역만리 독일 탄광의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되어 열심히 땀 흘리는 동안 우리나라는 오직 ‘수출1억불($)달성’이 국가적 지상목표였다.

또한 그 무렵 온 국민은 배고픔에서 벗어나자는 범국민적 의식개혁운동으로 농촌, 도시, 공장까지 모두 나서 함께 노력한 결과 식량자급자족은 물론 민둥산도 푸른 숲으로 바꿔 놓았다. 젊은 아빠들은 가족과 이별한 채 열사의 땅 중동건설현장에서 혹은 먼 바다 원양어선에서 밤낮없이 땀 흘렸고 그에 힘입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으로 1억불수출이 100억불로, GNP는 1000불시대를 넘어 1만불초과달성이라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장안의 화제였던 가수 조용필의 히트곡 “일편단심 민들레야”가 최근 모TV프로그램 ‘미스터트롯’에서 시청자 음원챠트 1위로 이변을 낳았다. 이를 두고 스물아홉 청년의 노래솜씨보다 노랫말에 숨겨진 지난날의 애환이 너무 절절하여 많은 사람들이 울컥했을 거라는 시사평이 나온 것을 보면 고단했던 어버이들의 지난했던 삶이 노래 한 곡에 실려 한풀이된 것은 아닌지 묻고 있다.

그랬던 그 들은 오직 부강한 조국(祖國)을 꿈꾸며 다음세대만은 훌륭히 공부시킬 요량으로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농우(牛)까지 팔아 학비를 대주었다. 오죽하면 상아탑(象牙塔)이라던 대학 캠퍼스를 일러 우골탑(牛骨塔)이라고까지 불렀을까? 그 후 자유 정의 진리를 부르짖던 대학캠퍼스에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온 외래사조는 신세대의 신문화였다.

일부의 자유분방한 젊음들이 레닌 사상까지 뜨거운 가슴으로 불태운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분별없는 일부가 아직도 슬픈 군상이 되어 ‘내로 남불’의 화신으로 정의까지 왜곡하며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많은 아버지들의 소망과 어머니의 바람이 결코 급진사조(思潮)를 원한 게 아니었건만 유감천만 이다. 만인이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오매불망 바랄 뿐인데 상스러운 비속어(꼰대)까지 들먹이며 패를 가르다니 개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1905년에 <황성신문>장지연 주필은 ‘시일야방성대곡’을 써 남겼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전혀 다른 시대상황임을 모르는바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 하나는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는 불변의 역사적 교훈이다. 모두가 두고두고 깊이 새겨볼 일이다. 지나온 세월 어머니의 눈에는 눈물조차 마른 지 오래요, 아버지의 손에 든 소주잔엔 눈물이 절반이었던걸 정녕 모른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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