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장계도 코리아플러스 논설 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시카고=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대한민국의 리더는 의식과 생활습관을 바꾸어야 한다.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게 노니다가 집에 와 잠자리에 들렸더니 다리가 네 개더라. 본디 두 개는 내 것인데 다른 두 개는 뉘 것이던가. 에라. 이미 빼앗긴 걸 내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이다. 남녀 간의 외도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른 게 없는 듯하다. 미국의 경우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배우자 외에 일생동안 외도를 즐기는 상대가 평균, 남자는 8명의 여자를, 여자는 6명의 남자를 거친다고 하는데 몇 년 전 한국의 통계에도 미국과 별반 차이가 없다. 10여 년 전, 영국의 한 진화생물학자가 영국 리버플의 어느 중류층 아파트 단지를 무작위로 선별해 D.N.A 조사를 했더니 20%를 조금 윗도는 수의 아이들이 씨가 다른 외도를 통해 생긴 남의 자식이라는 통계에 크게 놀란 일이 있었다. 다른 동물 세계에도 외도는 있다. 가령, 북미 ‘유리멧’이라는 새는 다른 짝과 외도를 통해 얻는 새끼가 40%나 된다는 보도가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필자는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당연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성히롱과 성추행은 다르다. 위력과 폭력 또는 권력이나 속임수로 자신의 본능적 이익만을 챙기고 약자를(남자건 여자건) 괴롭힘과 상처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헨리 키신저’는 “권력은 최상의 정력제”라고 했다. 이번 박원순 서울 시장의 자살은 큰 충격이다. 권력을 앞세운 성폭력에 법의 보호를 받도 싶었다는 피해 여성의 절규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양심과 도덕에 위배된 자신의 언행은 남이 모르는 나만의 죄책감이지만 양심과 도덕에 위배된 자신의 언행에 남에게 알아차림을 당했을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의 수치심이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은 모두 내적 갈등이지만 외적 냉소와 사회의 채찍에 시달려야 하는 수치심은 죽음의 고통보다 더욱 세차게 찢어지는 감정에 굴복되어 자살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번 박 시장의 성추행 사건에 연루된 상대가 더 있다는 보도에 사람들은 열을 올리지만 습관은 관성을 갖고 있다는 심적 원리를 이해한다면 별로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필자는 20대의 직장여성을 상담한 일이 있다. 직장의 상사가 “김양이 너무 예뻐서 3일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내가 그렇게 예쁜가?’하고 좋아하며 몸도 마음도 내맡기며 ‘이것이 로맨스구나’하는 망상에 들떳는데 다른 지역으로 직장을 옮겨가게 되었을 때 자기 후임으로 새로운 여직원에게 자기에게 했던 언행을 똑같이 하더라면서 그제서야 성폭행의 희생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였음을 깨달았다고 했다. 외도나 불륜이나 성폭행을 하는 사람은 정력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습관상의 문제이고 자신의 충동을 억제치 못하는 훈련 부족과 미성숙의 문제요. 정신장애자이며 파렴치한 사기꾼일 뿐이다.

1980년대 부흥사였던 ‘짐 베이커’ 목사의 성추행 사실은 동료 ‘짐 수오가트’ 목사의 폭로로 하늘을 찌를 듯하던 그의 명성과 부는 단숨에 무너졌고 대신 감옥행을 했는데 ‘짐 베이커’의 끈질긴 보복성 추적 끝에 알고 보니 ‘짐 수왜가트’ 역시 사창가를 출입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그 또한 추락하고 말았던 사실을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밝고 건전한 사회구성을 위해서는 남이 알던 모르던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 기준을 따르는 <Guilty>문화가 앞서야 되는 것이고 종교가 다루어야할 문제이다. 이번 박 시장의 사건은 당국의 자세한 추가조사가 사인을 밝혀내겠지만 아마도 그의 자살은 피해자의 고소 사실을 인지한 것으로 보아 감당키 어려운 수치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도처에 널려있는 성폭행 성추행 자들이여! 빛을 가리는 장막을 걷고 밖으로 나오라. 남이 모르는 소행을 당신 스스로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곧 예수가 외치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마태 4:17)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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