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장계도의 세상만사】 남자의 갈비는 23개요. 여자는 24개라고 고집하는 성실한 기독교인 을 자처하는 40대 여인이 있었다. 어째서 남자는 갈비뼈 하나가 모자랄까(?) 물었더니 아담이 잠든 사이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내어 그 갈비뼈로 이브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 창세기 2장 21~22절에 분명 그렇게 쓰여있다.

고등교육도 받고 신앙생활도 오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대답이라니 아연실색할 일이다. 물론 지도자들의 책임도 있지만..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재작년 어느 종교잡지 광고에 보니 “성경세미나” 광고에 사람의 갈비는 모자라는 갈비뼈 하나쯤은 재생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모자라는 갈비뼈를 재생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의학기술이나 어떤 섭리는 차치하고 마치 창세기 2장의 그 내용은 틀림없는 문자 그대로의 해석을 뒷받침하려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아닌가. 의학의 아버지라면 기원전 5세기의 <히포크라테스>라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실은 2세기경 로마의 의사였던 <갈레노스>가 의학사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적어도 16세기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전까지 1400년 동안 말이다. 로마 시대에는 인체 해부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탓에 <갈레노스>는 인체 해부 대신 돼지나 원숭이 같은 동물을 해부하여 인체의 내부기관을 유추해석 했을 뿐이지만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死體)를 해부 연구한 최초의 해부학자로 1543년 인체해부학(De Humani Corporis Fabrica)이라는 저서를 남김으로서 후세, 의학발달에 더 큰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런데 <베살리우스>는 그의 저서를 통해 사람의 갈비뼈는 남녀 똑같이 24개라고 밝혔다. 이 사실을 계기로 <베살리우스>는 당시 이단자로 취급되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느라고 곤욕을 치뤘다.

플라톤의 저서 향연(Symposium)을 보면 비슷한 그리스 신화 얘기가 나온다. 인간은 본래 남녀가 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둘이 한 몸이 되어 더욱 민첩하고 힘이 센 것을 제우스신이 질투하여 반으로 갈라놓았다. 이때 반쪽 또는 다른쪽을 히브리어로 첼라(tsela)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을 그리스어로 (70인 역-Septugianta-) 번역할 때 “tsela”가 가지고 있는 “갈비” 다른 쪽 “잃어버린 다른 반쪽”이라는 뜻 중 갈비뼈(rib)로 번역해 놓았다. 첼라는 구약에 35회나 언급되고 있는데 오직 창세기 2장 21절에만 갈비뼈로 잘못 번역한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이란 잃어버린 다른 한쪽을 찾아 합쳐져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사랑은 다른 쪽을 찾아 합쳐짐으로써 온전해지려는 욕구이고 이 욕구충족을 위한 노력을 곧 사랑이라고 한다.”고 했다. 사랑은 이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해하는 것만큼만 사랑할 수 있다. 두세 살 박이 아이에게 1불짜리 장난감 총과 1백만 불짜리 수표를 놓고 고르라고 해보라. 분명 1불짜리 장난감 총을 가진다. 그 총은 아이로서는 이해의 범위 안에 있지만 1백만 불 수표는 이해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이해와 소유는 같은 것이라고 했는데 그럼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당신은 아이들 또는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당신이 예수를 사랑하고 부처를 사랑한다면 과연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 보자. 성경의 갈비뼈 얘기는 물론 남녀 간의 융합을 두고 한 말이지만 남녀의 지위를 주종관계로 보지 말고 나와 너(타인들)의 융합만이 우리는 온전해진다고 확대해석해 보자. 아무튼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내 가치는 네가 있어 발현하고 너는 내가 있어 존재한다. 또 공기나 물이나 해가 없으면 나나 네가 존재할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이 집합체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어느 것 하나 뺄 수 없는 인(因)과 연(緣)의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無我)사상이 아니겠는가. 이웃을 내 몸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20세기의 인류학자 애슐리 몬태규도 지적했듯 상호 의존 없이는 세상 어떤 유기체도 살아남은 예는 없다. 흄이나 칸트의 말대로 성경은 해석의 문제라고 했는데 숨은 뜻을 헤아려야지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이해할 수 있을까?

끝으로 한마디만 더하자.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은 나를 잘 대해주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그 사람을 잘 대해주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말이다. 내 몹쓸 편견과 고집에 기다리지 말고 온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면 먼저 손을 내밀어 보자.

저작권자 © 코리아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