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돌아보기 사육신 (死六臣) 중의 한 사람

 

고목 정자나무 수령 400년 이상
고목 정자나무 수령 400년 이상 잎이 무성할 때 사진 오공임 기자
고목 정자나무 수령 400년 이상
고목 정자나무 수령 400년 이상 나목이 된 고목의 기품 사진 오공임 기자

【오공임 칼럼】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38세 거열형으로 죽음.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성삼문은 1435년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세종 때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한 [동국정운].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453년(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인조때 나라의 비밀을 청나라에 누설한 김자점(1646년 인조24) 영의정에 오름,인조가 죽은후에 효종이 등극후 새왕이 옛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한다는 고발을 했는데, 김질의 6대손인데, 배신의 피가흐르는 것을 어찌하랴?)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마치 고려 충신들 두문동 72현을 본받았는가? 忠臣은不事二國:두문동 ,72현은 두 나라(고려,조선)를 섬기기를 거부했다!!! 성삼문은 정몽주, 이색, 길재, 이숭인, 오상덕(필자오해선의 18대조),및 김충환등 고려 충신들을 닮았는가?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성삼문은 모든 공문서에 臣:신하신, 巨:클거 臣신하신 대신 글자 꼴이 비슷한巨자로 썼다고 전하여 온다!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 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단종)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을 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 최후의 사형장에서 지은 시는

擊鼓催人命,首顧西日落 격고최인명 수고서일락

黄天無一店,今夜宿誰家 황천무일점 금야숙수가요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당시 그에게는 대 여섯살 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뒤에 온 몸을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위치한 사육신 성삼문의 묘가있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성삼문 作 詩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시호로 정하다

조선 선비의 사표가 되시다!

2020.10.31.

글/平康 吳海宣

○ 역사를 보면 참으로 아픕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정신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당당히 버린 사육신 그중 성삼문오해선 박사 께서 보내주신 글을 보면서 오늘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됩니다.

성삼문 의 사형 전 시 한 수는 당시의 모든 일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고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어쩌면 정몽주 선생의 단심가와는 너무 닮아 충신의 마음에 절로 머리가 조아려집니다.

10월의 마지막 날 시간의 빠름이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단풍은 절정을 이루어 다갈색 또는 피 보다 짙은 선홍 빛 푸르른 청명한 하늘이 눈이 부실 만큼 시린 가을 가끔씩 집을 찾는 텃새 울음에도 정겨움이 담겨있습니다.

아직 서리는 높은 곳에서 점점 하산 채비를 갖추어 때를 기다리는 대 자연 시월은 제 할일 다하고 갈 길을 재촉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이라 수 없이 도착하는 카톡 문자와 영상 sns시대를 살고보니 때로는 불편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개인 사생활도 모두 노출이 되어 이름 한자 검색하면 모든 정보를 보게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단풍 구경 나들이 하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코로나19는 아직도 세자리 수를 지키고 있기에 사람이 많은 곳은 피해야하며 단체 외식 할때의 예절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말이자 10월의 마지막 날을 뜻깊고 의미있는 멋진 추억하나 준비해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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