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용은 공주영명중ㆍ고등학교 이사장

【공주=코리아플러스】 박병주 기자 = 학교교육과 교회, 기독교사회운동단체가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있어 근대화의 불씨를 당기고, 변화하는 시대의 역사적 굽이 길에 민족의 이정표를 제시해 왔음을 긍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교인 영명학교교육에 20여 년간 헌신봉사로 매진하셨고, 감리교회와 기독교사회운동단체가 우리 민족사에 이러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동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크나큰 역할을 하였겠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섬기는 리더십으로 사회적 봉사와 헌신에 일생을 바쳐온 지도력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표용은 학교법인 감리교영명학원 이사장은 바로 이런 지도력을 갖춘 지도자중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원로목사인 그는 학교, 교회, 언론, 사회단체, 봉사단체, 정부위원회 등 각 분야에서 자기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상을 갈망하며 일평생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했다. <편집자주>

인터뷰ㆍ정리 : 박병주 편집장

- 평생을 교계와 기독교사회단체에서 봉사와 헌신적인 삶을 살아 오셨는데 이처럼 민족과 시민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을 처음 갖게 된 시기와 동기는 무엇입니까?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한 영감으로 다가온 시기는 공주영명고등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영명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학교의 전신인 영명학교는 전국적인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3.1운동 독립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일 영명학교 현석칠 목사, 김관회 선생님 등의 교사와 조수 김수철 그리고 유우석, 노명우, 강윤, 윤봉균, 신성우 등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 1000장과 대형 태극기 4개를 제작해 공주읍내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으며, 학생과 교사 9명이 일본 순사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당시 충청남도 도청 소재지였던 공주에는 일본경찰서, 충남경찰부, 일본헌병대 등이 주재해 있었음)되었으나 곧바로 독립만세 시위 사건 연루자는 모두 석방(2년간 집행유예)됐다. 이어서 이들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역시 영명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결의해 결행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민족지도자를 양성했던 우리암(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한국명)교장선생님과 사애리시 명선여학당(공주영명여학교 전신) 교장선생님의 가르침에 의해 3.1 독립만세운동의 아이콘인 유관순 열사, 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지내신 조병옥 박사가 바로 영명학교 출신이십니다. 이와 같은 정통 민족사학 영명학교에서 공부하다보니 자연히 순국선열들의 얼을 배우게 됐고, 장차 나도 민족과 사회를 위해 일평생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 현재 감리교 영명학원 이사장님으로 모교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계신데 바램이 있다면요?

"1999년 6월 21일부터 모교인 공주영명중 ․ 고등학교 이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봉사하고 헌신한다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개교 114주년이 되는 민족의 역사와 함께 선열들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학교이고 우리학교 출신인 유관순 열사 서거 100주기를 맞이하는 뜻깊은 해입니다. 우리학교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유관순 열사와 친오빠인 유우석, 조병옥 박사, 조화벽, 노마리아, 김현경 애국지사를 비롯한 수많은 민족지사 그리고 종교, 정치, 교육, 경제, 문화계의 지도자를 수없이 배출해낸 명문 사학입니다. 우리 공주시가 교육도시로 전국에 소문이 나있는 것처럼 우리 공주영명고등학교가 기독교 학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선교사님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세워지고 이어온 것처럼 항상 기독교 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에 나아가 헌신과 봉사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미래사회의 지도자로서 갖추어야할 역량들을 갈고 닦아서 졸업 후 이 나라 이 민족을 이끌어 갈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들로 성장해 나가길 기도합니다. 영명학교에 근무 하시는 모든 교직원들의 건강과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 차고도 넘치시길 기도합니다. 공주영명중 ․ 고등학교 재학생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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