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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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도의 세상만사】 나를 정복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왕 중 왕이다.

192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불란서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는 인간은 태어나서 괴로워하다 죽는 존재라고 했다. 고타마 붓다(Gautama Buddha:석가모니)의 말을 빌리자면 인생은 고해(苦海)다. 말하자면 모든 선각자(先覺者)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듯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마치 격랑의 파도가 넘실대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망망대해란 온갖 고난과 역경 그리고 온갖 탐욕과 집착, 증오 그리고 갖가지 유혹에 시달리는 현실 세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망망대해를 무사히 항해하여 저쪽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야 한다. 강이나 바다를 건너가려면 우린 배가 필요하다. 그래서 각 종교마다 물과 배에 관한 신화나 설화가 많다.

힌두교의 성자(聖者) 밑에서 정진하던 한 제자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10년 후에 그 제자가 성자를 다시 찾아왔다. 스승이 물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느냐?” “10년 동안 물 위를 걷는 법을 공부했습니다.” “어허~! 공연히 헛수고만 했구나. 단돈 몇 푼이면 뱃사공을 구할 수 있는 것을! 시간만 낭비 했구나” 팔리어 경전에도 물 위를 걸어 부처님을 뵈러 온 제자들에게, “그래! 한두 푼이면 될 것을 뱃사공을 구할 수 없었더냐?”하고 꾸짖었다. 말하자면, 물 위를 걷는 재주가 있다고 해서 즉, 그런 신통한 방법이 있다고 하자. 그게 어떻다는 말이냐. 그게 나를 정복하고 남을 사랑하는 이타행(利他行)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말이다.

미숙한 사람들은 잠시 혹(惑)하게 할 수는 있다. 이슬람교의 한 분파인 페루샤의 수피교 성자 안사리(Ansari of heart)의 말을 들어보자. “뭐? 물 위를 걷는다고? 그럼 지푸라기보다 나은 것이 뭔가? 뭐? 또 공중을 나른다고? 그럼 청파리(Blue Bottle) 보다 나은 것이 뭔가? 네 가슴을 정복하라. 그러면 남을 사랑하고 또 그들이 너를 따르는 위대한 사람이 되리니.” 성서에도 노아의 방주 얘기도 있고 그 유명한 물 위를 걷는 예수(마태14:25. 마가6:49~50) 얘기도 있다. 물 위를 걸은 예수야말로 자유인이다. 즉, 온갖 고난과 역경 또 탐욕과 유혹을 물리친, 말하자면 가슴을 정복한 분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물 위를 걸은 예수의 신통한 방법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에소테릭(esoteric:심층의 숨은 뜻)을 헤아리는 것이 자기성숙에 훨씬 유익하다는 말일 뿐이다.

사람이 물에 빠진다 함은 온갖 시련과 고난 갖가지 유혹에 굴복되어 허덕인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꿈을 꾸고 있다는 말이다. 꿈이란 허상에 집착한 채 망상 속에 고뇌하는 현실 세계다. 5세기 중국 선종의 제3조 승찬 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이런 선시가 있다. “잠자지 않으면 (眼苦不睡) 즉, 지혜를 구해 허상에 매이지 않으면 꿈을 꿀리 없으매 (諸夢自除) 즉, 상(相)에 매이지 않느니 마음이 분별함이 없으면 (心苦不異) 즉, 한마음에 머물면 다 부처인 것을 (萬法一如) 즉, 그저 다 좋은 것을 왜 두 마음(罪)에 허덕이며 괴로 워하는가” 누구나 악몽에 시달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괴물에 쫒긴 다 던 지 내리막길에 브레이크가 고장 났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허나 그 고통을 끊는 법을 아는가.

그야, 꿈에서 깨야지! 그런데 옆에서 누가 흔들어 깨워주면 얼마나 고맙겠는가. 부처나 예수는 꿈꾸는 우리 모두를 잠에서 깨어나라고 매 순간 흔들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우리는 꿈을 깨고 배를 저어 저쪽 피안의 세계로 항해해야 한다. 그 배의 모양이 다르다고 투정해서도 아니 되며 또 내 배만이 진짜라고 어린애 같은 고집을 부리면 않된다. 빛을 받는 창(窓)이 삼각형 창이든 사각형 창이든 또는 원통형 창이든 빛은 어느 창을 통해서건 들어온다. 학식과 출신과 신분을 자랑 마라. 그리스 철학자들이 즐겨 부르짖던 이런 속담이 있다. 지혜로운 자가 왕이다. 그래서 꿈을 꾸지 않는 부처나 예수 같은 각자(覺者)는 왕 중의 왕이다.

수피교의 성자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in)이 학자 한 사람을 자기 배에 태우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학자가 보기로는 사공의 주제가 별것 아니라고 느꼈던지 물라 라스루딘에게 물었다.“당신은 글을 좀 배웠소?”“아니요. 왜요?”그러자 학자는 그러면 그렇지 말투가 좀 어줍잔터라는 생각에 자신은 수준이 남다른 지식인임을 자부하면서 말했다.“그렇담, 당신은 인생의 반은 헛살은 거요!”물라 라스루딘은 아무런 대꾸 없이 배를 저었다. 조금 후, 풍랑에 배가 뒤집힐 듯 요동을 쳤다. 그러자 물라 라스루딘이 학자에게 물었다.“학자님은 수영을 배웠습니까?”“아니요. 왜요?”그러자 물라 라스루딘이 말했다.“그렇담 학자님은 인생의 전부를 헛삶을 살 은 거요. 지금 이 배가 가라앉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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