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출신 故김풍익 중령, 한국전쟁 당시 서울 수호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산화

[예산=코리아프러스] 김은미 기자 =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전국 포병의 산실인 육군 포병학교에서 포(砲)의 신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전쟁 영웅이 예산출신으로 밝혀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포신으로 불리우는 전쟁 영웅은 예산 신암면 출신 故 김풍익 중령(1921. 8. 6.~1950. 6. 26.)으로 이번에 알려 진 것은 육군포병학교 교장 신동만 소장이 포병학교장으로 부임 후 학교 내에 위치한 ‘풍익당’과 김풍익 중령의 동상의 유래를 찾아보다가 이번에 널리 알려진 것.

[예산=코리아프러스] 김은미 기자 = 김풍익 중령 흉상 (사진제공=예산군)

故김풍익 중령은 1921년 8월 예산군 신암면 종경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 사관후보생으로 입교해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1950년 5월 소령 진급과 함께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 2대대장으로 부임해 교육생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 해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시작으로 한국전쟁이 발발, 38선을 넘어온 북한은 경기도 포천을 점령한 후 서울 점령의 교두보인 의정부를 위협하기에 이르러 서울이 위태로워짐에 따라 국군은 의정부 북쪽의 축석령과 금오리 중간에서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고 김풍익 소령도 화력 지원임무를 받고 작전에 투입되어 제2포대를 포진시키고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아군이 보유한 105mm M3 구형 야포로 밀려오는 북한의 T-34 전차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전차무기가 없던 상황에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 방법은 야포의 직접 조준사격뿐이라고 판단한 김 소령은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를 비롯한 7명의 결사대를 편성해 야포를 전진 배치하고 직접 조준사격으로 적의 전차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속하던 적 전차의 집중 사격을 받아 김풍익 소령을 포함한 전원이 현장에서 산화했다.

신동만 육군포병학교장에 따르면 포병은 후방에서 지원 사격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적을 근거리에 두고 직사포로 대응한 것은 포병사(史)에서 유일무이한 일이며, 김풍익 소령의 이와 같은 활약으로 당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지연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육군 중령으로 일계급 추서되었으며 1950년 10월 30일 충무무공훈장과 1950년 12월 30일 을지무공훈장이 수여됐으며 금년 2월 한국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으로부터 ‘이달의 6.25 전쟁영웅’ 및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석환씨(금년 3월 사망), 장녀 김성희씨와 차녀 김성자씨가 각각 경기도 화성시와 서울 동작구에 거주하고 있다. 특히 차녀인 김성자 씨는 당시 부인 김석환씨가 임신 중으로 태어나지도 않은 상태였고 김 중령은 둘째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전장에서 안타깝게 전사한 것으로 주위를 뭉클하게 한다.

김 중령의 유해는 현재 국립 서울현충원 위패 봉안관 48관 1호 212번 위패로 모셔져 있으며 육군포병학교에서는 1980년 6월 25일 교내에 김 중령의 동상을 건립하고 김 중령의 이름을 따서 ‘풍익당’이란 기념관을 조성해 후배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흉상이, 의정부 축석령에는 전적기념비가 건립되어 그의 애국 및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한편 예산군은 지난 8일 신동만 육군포병학교장(육군 소장)이 예산군을 내방해 김풍익 중령 기념 상징물 건립 등 선양사업을 함께 할 것을 요청함에 따라 자체 검토를 통해 육군 포병학교 측과 유기적인 협조 체제를 유지하는 한편 6.25 참전 기념비와 정긍모 제독 흉상이 있는 예당관광지 조각공원 안에 김 중령의 추모 상징물을 건립할 계획 등을 검토 중이며,

육군 포병학교에서도 포병의 신으로 알려진 김풍익 중령의 상징물이 건립될 경우 포병학교 군인들의 교육 코스로도 활용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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