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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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도의 세상만사】 두 스님이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잿빛 승려복이 낯설었던지 개 한 마리가 몹시도 짖어대며 두 스님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스님 ‘A’가 스님 ‘B’에게 말했다. “도(道) 닦는 스님이 저 개를 좀 조용하게 해보시오.” 스님 ‘B’는 뒤돌아서서 아주 엄숙한 표정에 근엄한 자세를 취하며, “어흠~! 조용히 물러가지 못할까!” 손을 내저으며 호령했다.  개는 이빨을 들어내며 더 세게 짖어댔다. 스님 ‘B는 포기하고 스님 ’A’에게 말했다. “나는 않되겠오. 도통한 스님이 한번 해 보슈.” 스님‘A’는 돌아서서 웃는 낯을 하고는 소매섭에서 밥 한덩이를 꺼내어 개에게 던졌다. 사납게 짖어대던 그 개가 조용해지더니 꼬리를 흔들면서 밥을 받아먹었다. 그리고는 다소곳이 오던 길로 사라졌다. 진리구현도 수시처중(隨時處中)의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이는 중용(중용)의 핵심사상으로 권(權)과 변(変)을 필요로 한다. 권은 상황판단이고 변은 융통성이다. 스님‘B’는 곧기만 하지 상황판단이 어둡고 융통성이 없다.

병원의 입원환자를 위문간 기독교인들은 대게는 다짜고짜로 통성기도에 찬송까지 곁들이는 의식(예배)을 치른다. 그러면 같은 입원실에 안정을 요하는 다른 환자에게는 큰 부담이다. 내 친구 하나도 입원 중 교인들이 위문한답시고 소란(?)을 피워 같은 방 환자의 요청으로 방을 옮기기까지 했는데 그래도 위문오는 교인들은 여전했다. 근접한 다른 병실이나 같은 병동의 복도가 조금은 시끌시끌 그랬다. 급기야 병원 측에서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방문을 꺼리면서 친구에게 경고까지 했다. 내가 살고있는 롬바드시의 20가구 정도의 한 아파트에 매일 한밤중에 모슬렘 가족 40~50명이 모여 알라신을 경배하는 통성기도와 챈팅(염불)으로 이웃들의 불평을 많이 샀다. 아파트관리사무실의 경고와 사정에도 거룩한 알라신 경배의식을 방해한다며 종교의 자유를 들먹였다. 결국, 시청의 법적 조치로 그들은 모두 퇴거당했다.

미국 시카고 출발 일본 도쿄행 밤 비행기에 미국 기독교 선교 청년단원들 10여 명이 비행기 뒷켠에서 할렐루야를 부르짖으며 기타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있었다. 12시간의 밤 비행기에 잠못이루는 승객들의 불평이 대단했다. 승무원의 경고에도 되려 하느님 찬양을 이해 못하냐며 떳떳해 했다. 그들에게는 승객이 비기독교인이라며 자기들만이 진정한 크리스챤이라고 믿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신실을 자처하는 기독교인들이 조금은 아니, 많이 답답한 구석이 있다. 자기것만 내세우고 신(神)을 찬양하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거다. ‘맞다!’ 신을 찬양하는 것은 마땅하고 거룩한 일이고 나도 솔직히 누구나 그러길 바란다. 단, 때와 장소를 가리는 지혜(時中)가 부족한 것이 흠이다. 이건 공해(公害)다.

TV 뉴스를 듣자니 날로 번지는 코로나 감염 탓에 정부의 시책과 새로운 법령이 발포되는 중에도 ‘예배는 생명’이라며 비밀리에 대면예배를 보다가 법적제재를 받는 경우가 있다는데 종교탄압 운운하며 데모까지 일어나는 건 기가 막힌다. 그간 신천지교회나 사랑제일교회와 같은 종교집회에서 코로나 감염이 심각했다는 것을 다들 기억하고 있는 데 그럼, ‘예배는 생명’이라면서 그들은 왜 남의 생명은 고려치 않는 걸까! 지금 이런 글을 쓰고있는 나를 보고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혹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중용에 군자는 수시처중하고 소인은 수시처중에 반(反)한다는 말이 있다. 코란 5장 32절이 얼른 머리에 떠오른다.

“한 생명 구제는 인류를 구제함이요. 한 생명을 해침은 전 인류를 해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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