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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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도의 세상만사】 신혼여행을 막 다녀온 한 젊은이가 몹시도 고민에 쌓인 듯했다. “말해봐! 고민이 뭔데 그래?” 친구들이 수심에 찬 젊은이에게 재촉했다. 조금 머뭇거리던 그 젊은이가 입을 열었다.

“아 글쎄!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첫날밤을 막 치르고 나서 신부에게 돈을 주었어.” 그러자 한 친구가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제 버릇 개 주나!”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냐” “뭔데?” “100불을 주었는데 50불을 거슬러 주더라고.” 나는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한다. 도장에 나가 ‘기(氣) 운동’을 지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4시면 자명종이 울린다. 대부분 자명종이 울리기 전 잠을 깨지만 피곤할 때는 가끔은 자명종 탓에 잠을 깨는데 어둠속에서 반은 졸면서 콩알만 한 자명종 스윗치를 실수 없이 눌러 끈다. 자신도 신기하다고 느끼는 정확성은 50년 동안 익혀진 버릇(습관)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일상생활의 번복된 행동 경험은 이런 것이다. 한밤중 자다가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끝내고는 그냥 물 내리는 토일렛 핸들을 졸음 중에도 누른다. 무심중에 말이다.

이것이 바로 묵상(禪) 수련자들의 목표인 무심(無心)이다. 무심이란 반복된 행동상의 습관이라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하다는 것은 행동이 아닌 습관이다.”라고 했다. 도장의 많은 학생들이 한 수(기술)를 가르쳐주면 번복된 연습 대신 다음 수를 기다린다. 오산이다. 번복된 연습 없는 수련은 시간 낭비다. 가령, 누가 당신 멱살을 잡았을 때 1번 수가 좋을까. 3번 기술을 쓸까 생각한다면 이미 때는 늦은 거다. 손익(損益)을 따지는 것은 망설임이다. 왜냐하면, 무심은 생각, 감정, 오감(五感) 이전의 무의식적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 말했다. “당신이란 반복된 행위의 바로 그게 당신이다.”라고...

공자는 “성상근야 습상원야(性上近也 習上遠也)”라고 했다. 즉, 사람은 다 같은 성품을 갖고 태어나지만 습관 탓에 서로 달라진다는 말이다. 불가의 유식학(唯識學)에 훈습(薰習)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산스크리스트 어(語) 바사나(Vasana)의 한역으로 몸에 냄새가 밴다는 말이다. 술주정뱅이는 술 냄새 술집이나 카지노를 자주 들락거리는 사람은 담배 냄새(요즘은 실내 흡연이 금지됐지만) 바람피우는 사람은 이성의 체취나 향수와 화장품 냄새... 바로 이런 냄새가 차생(次生) 즉,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8식(八識)의 씨로 저장되는 법이다. 이것을 칼마(Karma:業)라고 부른다. 사실 무도(武道)나 선(禪) 수련의 진수는 이런 냄새를 지우자는 것이다. 이것이 수련이고 수양이다.

냄새나는 몸이나 옷을 빨고 씻거나 거풍(擧風)을 하거나 햇볓에 말려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 이것을 기독교적 용어로는 세례(洗禮)라 하는 것이고 불가에서는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예배소서 4:17~24)는 말이다. 사실 거듭난 사람(覺者)의 세상이 현실이고 냄새나는 사람들의 현세(現世, 世俗)가 환영(幻影)이다. 힌두교 적 용어로는 마야(Maya)란 말이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80) 간다거나 습관은 제2의 천성(天性)이라는 것은 수없이 들어온 말이지만 지금 당신에게서는 무슨 냄새가 나는가? 의식과 생활습관을 바꿔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회개하라(Metanoia:마태 4:17)는 말이다.

잡초 밭길을 걸으면 잡초 냄새 꽃밭을 걸으면 꽃 냄새... 이왕이면 한 번뿐인 인생 꽃밭을 걷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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