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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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도의 세상만사】 ’산이나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천국일세’

얼마 전 <하나의 마음과 둘로 갈라진 마음>이라는 제하(題下)의 내 칼럼을 읽고 그 칼럼 말미(末尾)에 일행삼매(一行三昧)가 수행(禪)의 목표요. 안으로 선정(禪定)에 든 마음은 외적 상황(相)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평상심(平常心)에 이르는 것이며 이것이 곧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이며 쉼(구원)이고 이것이 곧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고 한다.>는 대목에서 수처작주 입처개진의 참뜻을 물어온 독자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말의 사전적 의미인 ‘어디서든 주인이 되면 바로 거기가 진리의 자리’라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래도 모호하다며 쉽게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해왔다.

원래 이 말은 7세기 당나라 임제 선승(禪僧)이 한 말인데 ‘언제 어디서고 어떤 경우(境界)에 처하든 항상 본심(本心)을 허트리지 않고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면 그것이 진리이고 그 자리가 곧 천국이란 말이다. 기원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평상심을 닐. 아드미라리(Nil Admirari)라고 해서 이것이 곧 철학의 목표라고 했다. 닐. 아드미라리는 라틴어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인데 희. 노. 애. 락의 감정을 쉬히 들어내지 않고 설령 드러낸다 해도 남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절도(和)가 있어야 한다는 중용사상과 유사하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정치가요 시인이며 철학자였던 키케로(Marcus Cicero)는 “모름지기 사람은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면서 “어떤 경우라도 놀래거나 흥분하고 감탄해서는 않된다.”며 “이런 마음이라야 행복할 수 있다.”며 기원전 5세기경 자연 철학자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의 일화를 소개했다. 아낙스고라스가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고 있을 때 누가 급히 찾아와 비보(悲報)를 전했다. “지금 당신 아들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아낙사고라스는, “그래요? 내 그럴 줄 알았어. 어차피 사람은 한번은 죽는 거니까...”라면서 대수롭지 않은 듯 군중 앞에서 다시 하던 말을 계속했다.

1945년 에짚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제2장에 이렇게 쓰여있다. 예수님 말씀이다.“진리 탐구자는 그 진리를 찾을 때까지 계속 정진하라. 진리를 찾으면 혼란스러워지고 그리고는 놀랄 것이니 그 단계를 지나면 만사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문자적이고 신비에만 매달리는 근본주의자들처럼 기적과 병고침 또는 신통지묘력이나 예언과 같은 신앙의 부산물에 천착하는 초보자들은 ’천국은 장소가 아닌 마음의 상태‘라는 것만 들어도 몹시 놀라고 저항하기까지 할 테지만 성서의 진의를 파악하고 나면 진리의 요점은 왕(王)은 타(他)의 간섭이 필요 없는 것처럼 주권자(主權者)로서의 자기 통치가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치(統治)란 물리적인 힘이나 정치적인 외적 지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적 통제를 통한 외적 자극에 초연할 수 있는 그래서 자기의 본심(本心)을 허트리지 않는 평상심이듯 이것이 바로 주권자로서의 자유요 쉼이 아니겠는가. 이것을 ’구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존 밀튼(John Milton)의 실낙원(Paradise Lost)에 보면 ”천국은 심적 갈등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심적 갈등을 정복(統治)하는 능력에 있다“고 갈파하고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것을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하지 않는가. 외적 자극에 초연한 채 당신이 머슴이 아닌 주인으로 산다면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고 이미 천국 속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다.

마치 찬송(438장)에 있는 대로 ’산이나 들이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어디나 천국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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