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플러스 논설고문, 미국 시카고 세계합기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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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계도의 세상만사】 2001년 9월 11일 뉴욕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타가 이슬람 급진주의자 빈 라덴의 주도하에 발생한 모슬렘 알카에다 테러단의 공격으로 화염에 쌓였을 때 하늘을 치솟는 불길과 연기 속에서 “분명 악마의 얼굴을 보았다.”는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내가 물었다. “그 악마가 기독교 악마의 얼굴이더냐. 이슬람교 악마의 얼굴이더냐. 아니면 유대교나 불교의 악마더냐?” 사실 이건 우스광스런 말장난이다. 말하자면 악마는 형상이 없다는 말이다. 악마는 붉은색 날개에 긴 꼬리를 가진 박쥐로, 또는 머리에 뿔이 달린 험상궂은 기이한 모양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허나 사람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검은색 옷을 입은 드라큘라가 그 대표적일 테지만 십자가나 빛(즉, 지혜나 진리) 앞에서는 사족을 못쓰는 드라큘라 영화만도 500편이 넘는다. 다들 상상의 부산물이다. 기독교에서는 악마를 디아블로스(Diabolos)라고 하는데 즉, 히브리어의 사탄(Satan)은 하느님에 대항하는 악한 존재라고 해서 초기 기독교에서는 타(他) 종교의 신을 일컬었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든 악마에 관한 신화가 다 있다. 그리스어로 악마를 Diablos라고 하는데 편을 가르려는 이간질 또는 대적자, 방해꾼이란 말이다. 일반적으로 악마란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구원이나 깨우침을 방해하는 형이상의 존재들이다. 이를테면, 욕심, 증오, 분별이나 집착, 시기, 질투, 교만 그리고 각종 유혹에 흔들리는 감정과 같은 내적 요소들이다. 기독교적인 표현으로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는 내 발길을 붙잡는 겉사람에 붙어있는 불순한 군더더기다. 불교에서는 악마를 파피야스라고 해서 욕계(欲界)의 주인이라고 하지않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형상화하는 망상이 문제다. 사실 망상은 치료가 요구되는 정신질환이다. 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은 성숙할 수 없다는 말이다. 18세기 계몽주의가 시작되면서 악마는 정신학적 상상의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776년 베르린의 한 무명 작가가 쓴 ‘악마의 비(非)존재에 대하여(About The Non-Existence of Devil)’라는 책은 “악마를 외부에서 찾지 마라. 또 성경 속에서도 찾지 마라. 악마는 당신 마음속에 있다.”는 인간의 정신 속에 존재한다는 정신 철학적(Psycho Philosophical)으로 이해 하게된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8세기 영국 성공회 신부 윌리암 로우(William Law)의 다음 말을 들어보자. “신(神), 천국, 지옥, 악마 등을 밖에서 찾으면서 아는체하는 것은 마치 봉사가 빛을 보았다고 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훨씬 더 오래전 13세기 페르시아 문학의 대표자로 알려진 시성(詩聖) 잘랄 루미(Jalal Rumi)는 영성 가요 철학자로 또 이슬람 법학자였는데 그는 말했다. “악마를 보지 못했다면 그대 자신의 내면(自我)을 드려다 보아라.”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겉 사람인 이기적 자아를 죽이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수피교의 성자(聖者) 물라 나스루딘(Mulla Nasruddin)이 집 앞마당을 엉금엉금 기고 있었다. 이 꼴을 본 이웃 친구가 물었다. “뭐하는 거요?” “잃어버린 열쇠를 찾는 중이야.” “내 도와주리다.” 이웃 친구도 마당을 기면서 여기저기를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그 이웃 친구가 다시 물었다. “도대체 열쇠를 어디쯤에서 잃었어요?” “집안에서요.” 물라가 대답했다. 그러자 이웃 친구가 코웃음을 치며 꾸짖듯 말했다. “아니! 그럼 집 안으로 들어가야지 왜 여기서 헛수고요?” 그러자 물라가 대답했다. “아! 여기(밖)가 환해서요” 그렇다.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진짜로 아는 세상. 밖으로 들만 헤매는 것은 헛수고다.

안으로 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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