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노 대한민국평생학습지원센터 이사장 "대한민국은 건국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전=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천광노 대한민국평생학습지원센터 이사장은 22일 "지식강국 코리아를 만들기 위해서 대한민국은 건국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 코리아플러스 장영래

【대전=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천광노 대한민국평생학습지원센터 이사장은 22일 "지식강국 코리아를 만들기 위해서 대한민국은 건국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천광노 이사장은 코리아프러스(대표이사 진명현)와 코리아플러스(대표이사 강경화), 코리아플러스방송(사장 김영민)이 이 날 가진 지식강국코리아만들기 토론회에서 이 같이 강조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의 저자인 천광노 이사장은 "언론인과 교육자로도 큰 업적을 남긴 월남 이상재 선생은 지난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YMCA교육부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1924년에는 조선일보사장에 취임해 언론을 통한 민족교육운동을 펴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회장에 취임해 민족지도자로 활동하다가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월남(月南)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이야기했다.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선생은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한 청년으로 남아있다며, 이를 계승하고 발전 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판서 박정양(判書 朴定陽)을 따라 1881년 정부가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파견할 때 선생은 단장 인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개화사상을 갖게 됐다.

이후 선생은 우정국 주사(郵政局 主事)를 거쳐 주미(駐美)서기관 등을 역임하며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 잡기위해 관계에 몸을 담았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던 날 고종(高宗)은 이상재를 불러 의정부 참사관을 명했지만 이상재는 어명을 거역하고 단호하게 물러설 뜻을 밝혔다.

1894년 월남은 학부(學部)학무국장과 관립외국어학교교장을 겸임했다.

1896년 7월 선생은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 간립과 독립신문 발간 등을 통해 국민계몽에 앞장서는 한편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播遷)한 고종의 환궁을 강력히 촉구해 이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이어 서울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열어 러시아의 내정간섭과 이권침탈을 성토, 일반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선동했다는 죄로 첫 번째 투옥되고 옥고를 치뤘다.

1902년에는 소위 개혁당 사건으로 2년여의 옥중생활을 했으나 출옥뒤 곧바로 일제에 저항하는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활동을 비롯해 YMCA를 통한 청년계몽과 일본기독청년회의 국내침투저지, 국내청년종교단체 친목회 조직과 함께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창립 등 독실한 신앙인으로 삶과 왕성한 저항활동을 계속했다.

1924년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이어 자주독립의 신념으로 애국청년을 지도하고 언론을 통한 구국의 길을 모색했다.

이듬해 4월에는 전국 7백여 신문기자들이 참여한 조선기자대회를 개최해 의장을 맡아 일제의 언론탄압과 식민정책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이미 70을 넘긴 고령이었지만 일제의 탄압과 일제 앞에서는 젊은 청년보다 더 열정적으로 항거했고 민족의 진로에는 늘 앞장서 걸어갔다.

1927년 당시 좌ㆍ우익의 민족인사들이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을 위해 결성한 신간회에 선생이 초대회장으로 추대된 것은 이념을 초월해 이미 광범위한 민족적 신망을 얻고 있던 선생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토론회를 마치면서 천광노 작가는 "이 새대에게 본인은 건국정신을 영상으로 만드는 일에 힘을 다해, 후 세대에게 '건국정신'을 영상으로 남기는 노력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렇게 하는 것이 '청년' 이상재 선생을 따르는 제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오늘 함께한 언론사의 기자들도 청년 이상재 선생의 사상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해 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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