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을 위대한 첫 승전으로 이끈 '장군의 귀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빛나는 승리

【서울=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봉오동 전투'의 영웅,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15일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봉오동 전투' 승전 후 무려 101년 만이고, 조국 광복을 2년 앞두고 카자흐스탄 땅에 묻힌 지 78년 만이다.

우리 국민에게 잊혀졌던 독립군 영웅 홍범도 장군. 그는 어떤 삶을 살았고, 우리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인물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배우 최민식 님이 내레이션을 맡은 영상을 통해 우리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홍범도 장군의 생애를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소개했다.

그러면 독립군이 활약했던 간도는 누구 땅인가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이에 이를 한국통사 e등을 통해 간도는 누구 건지를 알아본다.

◇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빛나는 승리

1920년 국내외 독립운동이 한창 가열될 시기에 한국과 국경을 접한 서북간도 일대에서는 독립군의 무장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그러자 일제는 국경 수비를 대폭 강화하고 간도를 침입해 독립군 토벌에 나섰으며, 이에 독립군은 1920년 6월 봉오동과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간도의 무고한 한인들을 상대로 일대 학살을 자행한다.

1918년 일제가 국토조사사업을 완료하고 조선 국토의 40퍼센트를 차지하다.

1919년 일제에 항거하는 전국적인 항쟁이 일어나 만세 시위를 벌이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경신참변이 일어나다.

봉오동(鳳梧洞) 전투는 당시 독립군의 국내 진공전에서 비롯됐다. 1920년 6월 4일 신민단 소속의 독립군 30명가량이 중국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를 출발,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해 그곳에 주둔한 헌병 순찰 소대를 격파한 뒤 강을 넘어 귀환했다. 일제는 독립군의 잇따른 진공 작전을 막기 위해 경비를 강화했는데도 또다시 기습을 당하자, 조선군 제19사단 소속 국경수비대의 니미(新美) 중위가 이끄는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1개 중대와 헌병 중대를 동원해 독립군을 추격하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삼둔자 근처에 잠복한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군에 격퇴당하였다.

삼둔자 전투에서 패배하자 일본군 19사단 사령부는 독립군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250여 명 규모의 월강(越江) 추격대를 편성해 간도로 침투시켰다. 소좌 야스카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는 니미 중대의 본부와 합류해 두만강을 건넌 뒤 7일 새벽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 입구인 고려령(高麗嶺)에 이르렀다. 훈춘과 연길의 중간 지역인 봉오동은 최진동의 가족을 비롯해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독립군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특히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계곡 지역으로, 삿갓을 뒤집어놓은 것과 같은 지형을 띠고 있었다.

일본군 추격대가 봉오동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전 정보를 입수한 독립군이 기습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립군은 700여 명 규모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安武)의 국민회군이 통합한 대한북로독군부군(大韓北路督軍府軍)과 이흥수(李興秀)의 신민단 소속 한 부대로 이뤄져 있었다. 독립군 연합부대는 골짜기 입구에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한 분대를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골짜기를 포위한 채 매복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완전히 골짜기 안으로 들어오자, 독립군은 홍범도의 공격 신호에 따라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기관총으로 응사하면서 격렬히 저항했으나 이미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독립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이날 오후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로 일본군은 157명이 전사하고, 2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반면 독립군에서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그쳤다. 지형을 이용한 주도면밀한 전술과 연합부대의 일사불란한 대응이 일군 대승이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제는 간도 지역의 독립군을 아예 소탕하기 위해 1920년 10월 2일 훈춘 사건을 꾸몄다. 그해 8월 작성한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이라는 대규모 토벌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훈춘 사건은 일제가 중국 마적(馬賊)을 매수해 무기를 마련해 주고, 훈춘의 민가와 일본 영사관 분관 등을 습격하게 해 일본인 13명,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일제는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중국에 대해 “피해 보상을 하지 않으면, 일본군을 간도에 투입해 마적단을 토벌하겠다.” 하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일제는 “마적단에는 조선인과 러시아 인뿐만 아니라 중국인도 포함돼 있다.”라며 중국을 압박했다. 중국 영토 안으로 대대적인 병력을 투입할 계획을 미리 세워놓고, 중국이 이에 간섭하지 못하도록 약점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중국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고 대규모의 군대를 간도 지역으로 침입시켰다. 그 병력은 조선군 19사단 주력 부대와 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북만주 파견군, 관동군을 합친 것으로 2만 명에 가까웠다. 이들은 서북간도의 독립군을 목표 삼아 사방으로 포위 작전에 들어갔다.

독립군은 일제의 토벌 작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중국군이 일제의 강요로 토벌 작전에 참여하게 됐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다. 독립군은 우선 중국군과 협상하여 피전(避戰)을 약속한 뒤, 8월 하순부터 각 부대가 안도현 방면의 백두산 기슭을 향해 근거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를 벌이면 간도 지역 한인들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그 이전부터 독립군들이 마련해 놓은 대비책이었다. 이에 따라 연길현 명월구에 주둔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시작으로 의란구에 있던 안무의 국민회군, 봉오동에 위치한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등이 속속 이동했고, 왕청현 서대파(西大坡)에 근거지를 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졸업식 일정 때문에 다소 늦게 합류했다.

이로써 각지에 산재한 독립군은 10월 중순 안도현과 접경인 화룡현 2도구(道溝)와 3도구에 집결하였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3도구에 위치했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나머지 독립군 부대들은 2도구에 자리 잡았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10월 21일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의 백운평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패퇴시킨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26일 새벽까지 엿새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 연합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대규모의 독립군이 한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일본군은 아즈마(東) 지대 5,000명의 병력을 3도구를 공격할 야마다(山田) 지대와 2도구를 공격할 아즈마 지대 주력 부대로 나눠 독립군 집결지로 보냈다. 이렇게 하여 10월 21일 야마다 지대의 전위부대인 소좌 야스카와가 이끄는 1개 중대가 백운평 쪽으로 밀어닥쳤다.

당시 독립군은 일본군이 집결지를 공격하려 한다는 첩보를 미리 입수했고, 이에 따라 김좌진은 골짜기 통로의 좌우 산허리와 산기슭 등에 북로군정서 독립군 600여 명을 매복시켜 둔 상태였다. 이를 알 리 없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골짜기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자, 독립군은 김좌진의 명령에 따라 일시에 기습 공격을 했다. 600여 정의 소총과 4정의 기관총, 2문의 박격포를 앞세운 독립군의 공격에 일본군 200여 명은 20분 남짓 만에 거의 전멸했다. 이들은 독립군이 어디에 은폐해 있는지를 알지 못해 제대로 싸워 볼 수도 없었다. 독립군에서는 20여 명이 희생됐을 뿐이다. 뒤이어 골짜기에 도착한 야다마 지대 주력 부대도 결사 응전했으나, 절벽 곳곳에 매복한 독립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300명의 전사자만 낸 채 숙영지로 패주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 가운데 첫 번째 벌어진 백운평 전투다.

두 번째 전투는 2도구의 완루구에서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와 아즈마 지대 주력 부대 사이에 벌어졌다. 완루구 전투에서도 홍범도의 철저한 매복 작전에 일본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물러났다. 이어 독립군은 천수평, 어랑촌, 맹개골, 만기구, 천보산, 고동하곡 등지에서 잇따라 일제의 토벌군을 무찔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표에 따르면 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하고, 2,100명이 부상했다. 독립군 전사자는 130명, 부상자는 220여 명이었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최대의 승첩(勝捷)이었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의 한인을 학살하고 한인 사회를 초토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10월 말, 일본군은 용정촌 장암동에서 40대 이상 남성 주민 33명을 포박한 채로 교회당 안에 몰아넣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으며,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을 칼로 찔러 몰살시켰다. 5~6일 후 일본군은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다시 마을로 가서 가족들에게 시신을 한곳에 모으게 한 뒤, 시신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처럼 일본군은 10월부터 2개월간 서북간도 8개 현에서 3,600여 명의 한인을 살해하고 170명을 체포했으며, 부녀자 70여 명을 강간했다. 이들은 또 가옥 3,200채와 학교 41곳, 교회 16곳을 불태웠다. 이를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 학살 사건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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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근호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박찬구

부산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1991년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사회부, 정치부, 미래전략팀을 거쳤으며 현재 국제부에서 근무 중이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이근호 | 청아출판사

역사적인 사건들의 기승전결,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와 상호작용을 추적하여 5천 년의 한국사를 복합적으로 이해한다. 고대, 고려, 조선, 근대, 현대로 한국사의 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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