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코리아플러스】 길기배 장영래 기자 = 충청의 문화유산을 알기 위해 신해박해가 일어난 진산성당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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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코리아플러스】 길기배 장영래 기자 = 충청의 문화유산을 알기 위해 신해박해가 일어난 진산성당을 찾았다.
【금산=코리아플러스】 길기배 장영래 기자 = 충청의 문화유산을 알기 위해 신해박해가 일어난 진산성당을 찾았다.

금산군 진산면에 가면 선비길이 있다.

그 길은 전주로 가는 길이다.

그 길 중간에 진산성당이 있다.

진산성당을 방문해 그 곳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본다.

아울러 조선의 주자성리학을 알아보고 한국인은 어떻게 탄생하는 지를 알아본다.

이를 위해 천주교는 어떻게 조선에 전파 됐는지를 팬앤드마이크를 시청해 본다.

신해박해(辛亥迫害)는 1791년(신해년, 정조 15년) 조선 최초의 천주교에 대한 박해 사건이다.

신해교난(辛亥敎難) 또는 신해사옥(辛亥邪獄), 진산 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의 선비 윤지충이 종교적 가르침을 지키고자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룬 후 제사를 폐함으로 인해 사회적 파장이 일고 당쟁으로 까지 비화됨에 따라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한다는 죄명 하에 그의 행위에 동조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참수 당하였다.

정조는 관대한 처결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윤지충이 남인에 속했던 탓에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을 뿐만아니라 서인 조차 신서파와 공서파로 분열되었다.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은 천주교가 박해의 대상이 되자 배교하였다.[1]

그 공백은 중인들이 메우며 교세는 성장했으나 제사거부라는 교리는 천주교 탄압의 좋은 명분이 되었고 천주교는 정치세력 간에 정적 숙청의 희생양으로 악용되기 시작했다.[2]

신해박해를 필두로 하여 시작된 탄압은 신유박해, 을해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가 자행되어 수많은 천주교 성직자와 천주교도들이 '천주학 죄인' 또는 '천주학쟁이'라고 비난받으며 순교의 피를 흘리는 불행사로 이어졌다.

목차

1 역사적 배경

1.1 천주교 전래

1.2 문화 충돌

2 전개

2.1 폐제분주(廢祭焚主)

2.2 당쟁비화

2.3 체포 심문

2.4 윤지충의 항변

2.5 처결

2.6 극형의 명분

3 영향

3.1 당파 다툼

3.2 전교 활동

4 같이 보기

5 각주

역사적 배경

천주교 전래

중국을 통해 천주교가 전래된 초기에는 종교로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서학(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서양문물로 여겨졌다.[3]

이런 연유로 인해 18세기에 조선 사대부의 서가에는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가 꽂혀 있었다.

점차 천주교가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성장하였다.[4]

성리학의 한계성을 깨닫고 새로운 진리를 추구한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1784년 이승훈에 의해 조선 최초의 천주교회가 창설되었고 경기와 충청 내포, 그리고 전주를 중심으로 신도가 많이 증가하였다.[5] 1

785년 명례방 사건으로 역관 김범우가 귀양 가서 사망함으로 천주교 희생자가 처음으로 발생하였다.[6]

문화 충돌

정조(1776~1800)는 정도(正道)인 유학이 흥하면 사교(邪敎)인 천주교는 소멸될 것이라 하면서 천주교를 묵인하였다.[7][8]

이런 관대한 정책은 교세 확대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4]

그러나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사회근간을 이루고 있는 신분제 철폐나 가부장적 권위와 유교적 의례·의식을 거부하는 천주교의 확대는, 유교사회 일반에 대한 도전이자 지배체제에 대한 위협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기에, 1785년 정조는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금령을 내렸다.[6]

특히 관혼상제 문화가 매우 발달한 조선의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는 정면충돌을 일으켰다.

1715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제사를 우상숭배라고 선언하였는데,[9] 이는 지난 1656년 알렉산데르 7세 교황의 선언을[10] 뒤집으며 일대 혼란을 발생시키는 조치로, 이후 조상제사 거부라는 항목은 천주교 박해의 주요 이유로 십분 활용되었다.[5]

이런 불행은 1939년 교황 비오 12세가 동방의 조상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칙서를 발표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11]

전개

폐제분주(廢祭焚主)

로마 가톨릭교회가 조선의 해서(海西)·관동(關東) 지방의 일반 민중 사이에 신봉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었다.[12]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북경 교구에 속하였는데, 1790년에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Alexander de Gouvea) 주교가 조선 천주교도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13]

전라도 진산군에 사는 선비 윤지충은 그의 고종사촌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교를 접한 뒤 세례교인이 되었다.

그는 제사금지라는 종교적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으며 1791년 여름 모친상을 치룰 때에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교식 상장(喪葬)의 예를 쓰지 않고 조문도 받지 않고 로마 가톨릭 예식으로 장례를 진행했다. 그러자 그의 종친들이 분노 했다.[14]

당쟁비화

같은 천주교인이자 외사촌인 권상연이 윤지충을 옹호하고 나서고, 이에 대한 소문이 조정에 전해짐으로써 이 문제는 당쟁으로 비화되었다.[15] :32

남인에 속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으로 인해 서인이 남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남인 또한 천주교를 묵인하는 신서파(信西派)와 탄압해야 한다는 공서파(攻西派)로 분열하였다.

당시 서학 탄압에 앞장서온 홍낙안은 좌의정 채제공[16]에게 보낸 글에서 "저들 지충의 무리는 제사를 폐한 것도 부족하여 부모의 상을 당하고서도 혼백을 세우지 않았고 부모가 죽었음에도 조문을 받지 않으니 천지가 생겨난 이래 어찌 이와 같은 변괴하고도 사악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 죄는 살인한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윤지충의 체포와 사형을 요구하고 나섰다.[17][18] :79

체포 심문

정조는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노론 벽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어, 진산군수 신사원을 시켜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산군수는 윤지충의 집을 찾아 사당에서 위패를 넣어두는 주독을 발견하고 열어보았으나 위패는 없었다.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윤지충의 숙부가 감금됐다는 소식에 1791년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19]

그러나 그들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20]

진산 군수는 자신의 힘으로는 두 사람을 회유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자 두 사람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다.[21]

윤지충의 항변

윤지충은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모든 것을 토설한 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18] :79~80

그러나 윤지충의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5]:33

처결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했으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정조는 처형을 윤허했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사교를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다.[22][23]

이때 윤지충의 피가 튀어 붙은 전주성의 돌을 주춧돌로 삼아 전주에 전동성당을 건축했다.[1]

천주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극형의 명분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로써,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런 무부무군(無父無君) 사상의 신봉은 유교이념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 업고자 하는 무리'로 규탄 받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이렇듯 조선 지배층이 바라본 천주교는 체제와 정통에 대해 도전하는 사악한 종교였다.[24]

지난 1785년 명례방 사건이후 정조 역시 사교로 규정했었기 때문에 사형으로 처결함에는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영향

당파 다툼

정조는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고 마무리 짓기를 원했다.

이런 조처는 자신의 측근 중에 천주교에 가까인 간 자들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다.[7]

아울러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역 서양서적을 소각하는 등 천주교의 전파를 억제하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은 이 사건을 둘러싸고 남인 계통이면서 당시의 상국(相國)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소위 신서파와 이에 반대하는 홍의호 등의 소위 공서파가 대립하였다.

이런 갈등은 1801년 신유박해로 신서파가 결정적 타격을 입을 때까지 10여 년간 계속되었다.[25]

전교 활동

신해박해로 인해 천주교가 정치적 종교적 박해의 대상이 되자 많은 양반계층 교인들이 동요하여 배교후 떨어져 나갔다.[1] 그 공백은 중인계층이 메워나갔는데, 탄압에도 불구하고 1794년 무렵 신도수가 4천여 명으로 증가하자 중국 교회의 구베아 주교는 신해박해로 인해 보류되었던 선교사 파견을 다시 추진하였다.[26]

1795년 초에 서울에 잠입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이내 체포령이 떨어져[27] 은밀히 활동했으나 강완숙등의 도움에 힘입어 5년 후 교세는 1만 명을 육박하게 되었다.[28]

같이 보기

시파와 벽파

공서파와 신서파

각주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33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辛亥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7

[네이버 지식백과] 신유박해 [辛酉迫害]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辛亥迫害]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9

[네이버 지식백과] 정조 [正祖] (두산백과)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56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434

존 노먼 데이비슨 켈리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014.1월 초판 p423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6

[네이버 지식백과] 신해박해 [辛亥迫害] (종교학대사전, 1998. 8. 20.)

[카톨릭 평화신문]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2009년 3월 8일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32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채제공은 1790년(정조 14년) 좌의정이 되었는데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체제가 3년간 지속되며 정사를 좌우했다.

신복룡, 《전봉준 평전》, 지식산업사 (1996) 27쪽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 기독교의 역사1》 기독교문사(1989)

[네이버 지식백과] 권상연 [權尙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그 해 10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역도로 몰려 윤지충이 체포되었으며, 그에게도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진산관아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들이 믿는 교는 무군무부의 도가 아님을 교리를 들어 설명하면서 항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윤지충 [尹持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진산사건 [珍山事件] (두산백과)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1) 윤지충 "”. 평화신문. 2009년 3월 8일. 2009년 4월 16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3) 권상연 야고보 "”. 평화신문. 2009년 3월 29일. 2009년 4월 18일에 확인함. |제목=에 지움 문자가 있음(위치 1) (도움말)

박은봉 <한 권으로 보는 한국사> 가람기획 1993년 p210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신해사옥〉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46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47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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