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시 광석면에 위치한 노강서원 魯岡書院은 시대조선 후기 건립시기는 1675년

【논산=코리아플러스】 김도은 기자 = 광석중학교 청소년기자단 학생들이 능동적인 태도로 기사작성에 임하는 모습이다. / 코리아플러스 김도은 기자

【논산=코리아플러스】 윤해서 김용휘 김도은 기자 =  광석중학교 청소년기자단은 10일 도서관에서 학교 소개를 위한 자료조사와 정보수집을 하고 4개 모둠활동을 가졌다.

특히 이를 통한 육하원칙의 형태와 조직도 분류 등 기사 작성 양식에 맞추어 기사를 스스로 작성했다.

우선 정치행정 부서는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취재활동을 했다.

정치행정 부서가 찾아본 내용은 이다. 

광석중학교의 개교는 1987년이며, 교장선생님의 성함은 조광연 교장 선생님이며 광석중학교의 위치는 충남 논산시 광석면 광석로 56-3이다

다음으로 사회문화 부서는 광석중학교의 특색사업과 기대효과에 대해 알아봤다.

먼저 1인 1특기 갖기로 건강한 예술 감성 함양 특색사업의 목적은 재능과 적성을 개발해 창의적이고 인성 좋은 스마트 인재 육성과 연주회와 대회를 통해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고 음악적 소실과 적성을 확인하며 배려와 협동심, 성취감을 키워주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기대효과는 예술교육 활동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고, 학생들의 음악적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고 직업에 연계될 수 있고 합주를 통해 자연스럽게 상호배려와 협동심, 자신감, 성취감등을 경험, 학생들에게는 학교에 대한 흥미와 자신들의 끼를 발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했다.

경제산업 부서도 특색사업과 기대효과에 대해 찾아봤다.

광석중학교의 읽음과 이음으로 채워지는 사색 독서여행의 목적은 재능과 적성을 계발해 창의적이고 인성 좋은 스마트 인재육성을 위함이다.

기대효과는 예술교육 활동에 대한 친밀감을 높이고, 학생들의 음악적 소질과 적성을 계발하고 진로와 직업에 연계될 수 있는 것이다.

교육과학 부서는 광석중학교가 지향하는 교육의 가치에 대해 알아봤다.

광석중학교는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학생들이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미래 인재 육성을 위한 핵심역량기반의 행복 나눔 교육활동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학생상은 기초기본에 충실한 학생, 교사상은 배움을 중심으로 실현하는 교사, 학교상은 안전하고 행복한 학교, 마지막으로 학부모 및 지역사회는 자녀의 꿈을 찾아주는 학부모, 더불어 함께하는 지역사회 등이 있다.

광석중학교 청소년기자단 학생들은 이번 수업시간을 통해 기사 내용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기사를 작성해 수업에 대한 능동적인 태도와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한편 광석중학교 청소년기자단은 미디어리터러시 ‘논리적 글쓰기’를 통해 논산시와 광석면에 대한 지역사회를 알아봤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도시인 논산시에 위치한 광석중학교의  청소년기자단은 매주 3교시에 도서관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논리적 글쓰기를 체험했다.

이날 청소년기자단원들은 주장하는 글을 읽고 구조화 한 뒤 이를 자기주도학습으로 맵핑을 했다.

주장하는 글쓰기는 근거1. 근거2. 근거3을 팩트 체크를 한 뒤 주장하는바 근거를 검토했다.

이 날 수업을 통해 주장하기 위해서는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울러 커뮤니케이션활동을 통한 3학년의 맨토 활동을 통해 맨티인 1학년을 지도하는 맨토·맨티 모둠활동을 가졌다.

논산은 포효하는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한반도의 단전부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힘의 원천지로 선사 시대부터 조상들이 정착해 온 곳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이 위치하고 삼국시대에는 백제가 위치해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신라의 김유신이 이끄는 5만군대가 황산벌을 중심으로 백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연산, 은진, 노성, 석성 등 4현이 위치했고, 1912년 4현을 4군으로 변경했다가 1914년 4군을 병합해 논산군을 설치했고, 1996년 3월 1일 시로 승격됐으며, 2003년 9월 19일 두마면이 계룡시로 분리됐다.

사람중심 행복공동체 논산시는 강경읍, 연무읍, 성동면, 광석면, 노성면, 상월면, 부적면, 연산면, 벌곡면, 양촌면, 가야곡면, 은진면, 채운면, 취암동, 부창동으로 구성됐다.

인구는 2019년 12월말 현재 5만7196세대 12만2981명(외국인 포함)이다.

다음은 논산시 광석면의 역사에 대해 알아본다.

노강서원 魯岡書院 시대조선 후기 건립시기는 1675년이다.

노강서원

노강서원은 서원으로 교육시설이며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 오강길 56-5(오강리)에 위치하고 있다.

충청남도 논산시 광석면에 있는 조선후기 윤황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시도기념물.

1675년(숙종 1)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윤황(尹煌)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조선시대 안변부사, 승지, 대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윤황은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덕요(德耀), 호는 팔송(八松). 충청병마절도사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다. 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며, 어머니는 부제학(副提學) 경혼(慶渾)의 딸이다. 윤전(尹烇)의 형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7년(선조 30)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임명되었다. 1599년 주서로 입시한 뒤 군자감첨정·성균관전적을 거쳐, 1601년에 감찰이 되었으며 곧 정언으로 옮겼다.

이 때 홍문관은 중요한 부서이므로 은상(恩賞)으로 사사로이 임명할 수 없다는 것과 척신의 직을 파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후 병조·예조의 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북청판관으로 나갔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북청판관으로 혼인한 자제를 거느리고 관아에 머물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으며,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시골에 은거했다.

1626년(인조 4) 사간·보덕 등을 역임했으며,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주화(主和)를 반대해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 주화론자의 유배를 청하고, 항장(降將)은 참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주화는 항복이라고 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삭탈관직되어 유배의 명을 받았으나 삼사의 구원으로 화를 면했다.

이듬해 다시 사간이 됐고 길주목사·안변부사·사성·승지·대사성 등을 거쳐 1635년 대사간에 이르렀다. 이 때 전란으로 어려워진 백성의 구급책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으며, 이 후 이조참의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정묘호란 때와 같이 척화를 주장하다가, 집의 채유후(蔡裕後),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았다.

특히 전식이 쓸데없는 논의로 나라를 그르친 죄를 청하자, 인조 또한 “부박(浮薄)한 풍습은 통렬히 징계해 다스리지 않을 수 없어 이에 죄를 정한다.”하여,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 나와 죽었다.

사람됨이 강의(剛毅)하고 기절(氣節)이 있다는 평을 들었다. 영광의 용계사우(龍溪祠宇), 영동의 초강서원(草江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대사간大司諫은 조선시대 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으로 정3품 당상관직.

대간 또는 간장이라고도 했다. 사간원은 사헌부와 더불어 양사라 불리는 언론기관으로 여기에 속한 관원은 문과출신의 명망있는 인물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었다.

특히 대사간은 대사헌과 함께 언론과 규찰을 주도했는데 여러 가지 특권이 보장되었고 승진도 빨랐다.

이들 양사의 직책은 왕권을 견제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고, 관기를 바로잡기 위한 핵심적인 양반 관료직 이었다.

노강서원은 1682년(숙종 8)에 ‘노강(魯岡)’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됐으며, 윤문거(尹文擧)를 추가 배향했다.

그뒤 1723년에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을 추가 배향하고 1790년과 1883년에 중수했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 왔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5칸의 강당, 각 4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4칸의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다.

사우에는 윤황을 주벽(主壁)으로 해 좌우에 윤문거·윤선거·윤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행사,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재산으로는 대지 3800여 평, 전답 3400여 평 등이 있다.

노강서원 강당이 1974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됐고, 2011년 12월 30일 보물 제1746호로 승격됐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마지막으로 논산시의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Cultural Heritage)에 대해 알아본다.

세계유산은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위원회가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인류를 위해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한다. 세계유산은 문화유산·자연유산·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한국의 서원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은 조선시대(16세기 중반~17세기 중반) 성리학 교육기관의 유형을 대표하는 9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서원은 한국의 성리학과 연관된 문화적 전통에 대한 탁월한 증거이다. 돈암서원,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의 9개 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국의 중부와 남부 여러지역에 걸쳐 위치한다.

서원은 중국에서 도입되어 한국의 모든 측면에서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한 성리학 교육기관으로서 탁월한 증거가 되는 유산이다.

‘한국의 서원’은 2011년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인 ‘한국의 서원 통합보존관리단’ 이배용 이사장과 위원회를 중심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인 서원을 세계인의 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논의가 이뤄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2015년 9개 서원과 관련한 자치단체들이 협조해 1차 등재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이하 이코모스)의 현지실사와 전문가 패널회의 결과 ‘한국의 서원’이 가진 독창성과 9개 서원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으로서의 연계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반려’의견을 받았다. 내부 논의를 거쳐 등재 신청을 자진 철회한 이후 각 서원 및 자치단체와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나가며 이코모스의 지적사항을 보완해나갔고, 2018년 1월 재신청한 결과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는 영예를 안게 됐다.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1548~1631)의 강학 기반을 배경으로 건립된 서원이다. 황강 김계휘가 건립한 정회당과 김장생이 건립한 양성당에서 수학한 김장생의 제자들이 후에 스승을 추모하며 기리기 위해 돈암서원을 건립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12년)에 창건되었으며, 김장생과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의 문하에서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 이유태, 유계, 윤원거, 윤문거, 윤선거 등 수많은 명유(名儒)들을 배출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돈암서원은 호서지역의 산림과 예학의 산실이자 본거지로서 17세기 전 기간 동안 충청도 서인계의 수(首)서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서원의 혁파를 위해 전국의 47개소를 제외한 600여개소의 서원을 철폐했는데, 논산의 서원중 연산의 돈암서원과 광석의 노강서원만이 철폐되지 않고 남았다.

서원은 660년(현종 원년)에 사액되어 사계 김장생을 주향으로 하고 신독재 김집,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등 4명을 모시고 있다.

서원 내에는 사당인 숭례사와 강당인 응도당, 정회당과 양성당, 산앙루, 장판각 등 다수의 건축물과 돈암서원의 연혁을 밝힌 원정비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그 중 응도당은 고대의 가옥제도를 전범으로 해 지은 건축물로 유명하다.

세계유산적 가치

‘한국의 서원’은 한국의 성리학 문화 전통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추어 지역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서원의 기능과 건축적 배치 등에서 잘 보여주는 유산이다.

특히, 돈암서원은 기호유학의 본산으로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계승하기 위해 1634년에 건립됐으며, 사계 김장생 선생 이외에도 다수의 명성있는 유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해낸 것은 물론 조선 후기 성리학의 주류를 이룬 기호유학을 영도하는 위상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오르게 됐다. (출처:논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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