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유학자들은 천문연구를 후학에게 지도했는가

【충북=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충청의 문화유산으로 우암 송시열의 천추의. / 장영래 코리아플러스 기자

【충북=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충청의 문화유산으로 우암 송시열의 천추의를 알아본다.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충북대학교 본관 3층에 우상 송시열의 천추의가 있다. 충북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필자는 우암 송시열의 천추의가 충북대에 있는 것을 보고 천추의를 충청의 문화유산으로 알아본다.

송자로 칭송받고 있는 유학자인 송시열이 후학을 위해 천문연구에 관심을 갖고 지도했는 지가 관심이다.

먼저 한국의 위대한 천문유산, 세계적인 고천문과학관 건립을 건립하자는 이용삼 충북대 명예교수의 글에 따르면 오늘날 많은 민족들은 자기 민족의 역사에서 전통과학을 자랑하고 있다. 서양 과학의 그늘에 가려있었던 한국의 전통과학의 역사는 한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전통과학으로 첨성대, 금속활자, 고려청자, 한글, 측우기, 자격루, 각종 해시계, 거북선 등 우수한 전통 과학 유물들을 자랑하고 있다.

특별히 하늘을 보면서 우주에 대한 원초적 호기심은 누구나 갖고 있지만 우리 민족은 천문에 관한 한 유구한 역사를 일궈 낸 자랑스러운 전통이 있다. 경주 첨성대(瞻星臺)는 우리나라의 천문대의 모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백제의 천문학자들은 일본에 건너가 점성대(占星臺)라는 천문대를 축조하기도 하였다.

적극적인 천문활동을 통해 일월식 외에 오행성의 움직임과 각종 천변현상을 ‘삼국사(三國史)’ 기록으로 남겼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관계를 유기적인 관계로 여기며 당시 제왕과 국가의 안일을 천문현상을 통해 해석하였기 때문에, 천변의 관측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며 신중했고 정확해야 했다. 이러한 천문활동은 과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 의미도 갖고 있었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천문 관청인 서운관은 1308년에 설립한 천문, 역법, 기상, 지리, 표준시각 등의 관련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시대에 관상감으로 개칭되었던 이 서운관은 오늘날의 과학기술을 총괄하는 부서였던 셈이다. 서운관은 약 600년 동안 지속하면서 고려사 천문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천변등록에 천변현상 등 ‘하늘의 역사’를 기록하고 천문관측기기를 설명한 세계적으로 귀중한 자랑스러운 천문 유산들이다.

조선을 새로 건국한 태조는 하늘의 뜻에 의해 세워진 왕조를 내세우기 위해 고구려의 천문도를 구하여 돌 위에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 이른바 천상열차분야지도(1395년)로 알려진 이 석각천문도는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세종대왕은 중국과 이슬람의 과학기술을 융합한 원나라의 천문관측기기를 재현했을 뿐아니라 이들을 자동화, 소형화, 다기능화하는 독창적인 관측기기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즉 소간의, 일성정시의, 자격루(보루각루), 옥루(흠경각루), 측우기 등은 조선 천문학의 주요 천문관측기기로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 수십만 건의 천문관측기록을 남겼다. 천문관측기기의 개발을 통해 새로 완성한 칠정산내·외편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달력이었다. 이 달력을 통해 전국에 농업을 장려할 수 있었고, 해상교통을 통해 국가의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할 수 있었다.

조선에는 동아시아의 대표하는 혼천시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세종실록등의 기록을 보면, 혼천의에 수력(水力)의 시계장치를 연결하고 태양과 달과 항성들의 모형을 설치하여 계절과 시간에 따라 자동으로 운행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혼천시계는 조선 기계시계의 전통으로 유럽보다 이른 시기인 오스만제국의 기계시계와 맞먹는 것이다.

현종 10년(1699년)에 이민철과 송이영의 혼천시계가 세종의 기계시계의 명맥을 이었다. 충남 부여 태생인 이민철은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아들로써, 각종 수차와 혼천의 제작자로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 우암 송시열이 화양계곡에 은거할 때 제자들을 교육한 혼천의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한편 현존하고 있는 국보 230호의 혼천시계는 송이영이 제작한 것으로 동서양의 전통을 융합한 시계로 평가받는다.

서운관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측후소로 개칭되었다. 광복 후 국립중앙관상대를 거쳐 1974년 국립천문대가 설립되었고, 현재의 한국천문연구원으로 서운관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 과학의 모든 것들은 옛 선조들의 과학적 슬기와 연구 정신의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다.

서운관의 한 지류였던 기상에 대한 과학관과 박물관이 한국에 다섯 곳에나 건설되는 동안, 정작 인류문명의 중심이었던 고천문을 위한 과학관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중국과 일본처럼 선조들이 천문 관측을 통해 전해준 과학기술의 전통을 되살려서, 미래의 주역들이 세계의 과학문화를 선도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랑스런 전통 과학정신이 깃들인 고천문과학관이 국가의 지원으로 건립하기를 고대해본다고 밝히고 있다.(출처 서울신문)

다음으로 이상주 박사는 "화양 첨성대 천문관측소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은 이상주 박사의 글이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구곡의 6곡인 첨성대(瞻星臺)는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천문을 관측한 장소가 아니라 임금의 덕화(德化)의 중요성을 후학이나 백성들에게 교화하기 위해 강조한 유학사상에 배경을 두고 명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상주 박사(55.극동대 외래교수)는 23일 오후 충북 괴산군 괴산읍사무소 회의실에서 (사)괴산향토사연구회가 개최한 '괴향문화' 16집 발간 학술발표회에서 '우암의 화양구곡 '첨성대'에서의 천문 관측설 및 신기옥형 용도에 대한 검증'이란 논문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이 박사는 우암이 지은 '청주공북루기', '화양지', 박노중의 시 '차덕산구곡원운' 등의 문헌을 토대로 "화양구곡 첨성대는 '논어'에 나오는 임금의 덕화의 중요성을 자연물에 표상화한 것"이라며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이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은혜와 우리나라 선조와 효종의 성은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식을 가탁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화양구곡 첨성대는 이처럼 유학사상을 배경으로 명명된 것으로 우암이 천체를 관측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당시의 상황과 사상적 배경을 모르고 단지 '첨성대, 즉 별을 바라보는 대'라는 이름에 얽매어 해석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우암이 첨성대에서 천문관측을 하지 않았다는 근거로 첨성대의 명칭이 화양구곡 설정 이후 부여됐음을 들었다.

이 박사는 "우암은 화양구곡을 설정하지 않았다"며 "화양구곡은 우암 사후 제자인 민진원이 바위에 명칭을 새기면서 최종 완성됐고 첨성대란 명칭은 화양구곡이 설정되면서 명명됐다"고 설명했다.

이 박사는 "첨성대의 높이가 평지에서 100m도 안되며 올라가기도 불편하고 위험한 곳에서 천체를 관측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또 그는 우암이 소유한 선기옥형(璿璣玉衡)은 천문관측용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서경'의 기형률려(璣衡律呂.구슬로 장식한 혼천의)를 교육하기 위해 소지하고 있던 학습보조기구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이 같은 근거를 들어 지난해 '우암의 혼천의와 화양구곡 첨성대에 관한 고찰'이란 논문을 발표한 이용삼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교수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우암이 첨성대에서 실제 천문을 관측했고 선기옥형이 천문관측용이었다고 주장했다. (출처 뉴시스)

한편 송시열[ 宋時烈 ]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노론의 영수.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았다. 주요 저서에는 《송자대전》 등이 있다.

송시열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 문정(文正). 아명 성뢰(聖賚). 1633년(인조 1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급제하여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곧 사직,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고, 1637년 화의가 성립되자 낙향,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장령(掌令)에 등용,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으나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청서파(淸西派)에 속한 그는 공서파(功西派)의 김자점(金自點)이 영의정이 되자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이듬해 김자점이 파직된 뒤 진선에 재임명되었으나 김자점이 청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다고 밀고함으로써 북벌계획의 인물로 지목받아 청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충주목사(忠州牧師)·집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57년(효종 8) 효종에게 정유봉사(丁酉封事) 상소를 올려 그의 북벌정책을 비판하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양보를 이끌어 내었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되고, 이조판서로 임명되어, 효종의 명을 받아 북벌계획을 담당하였으나 이는 명목상 추진하였을 뿐 실질적인 북벌정책에는 반대했다. 이듬해 효종이 급서하자 북벌계획은 곧바로 중지되었다. 그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기년설(朞年說: 만 1년)을 주장하여 관철시키고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하면서 서인의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별세로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어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주장하였으나 남인 쪽이 내세운 기년설이 채택됨으로써 실각하였다. 제1차 복상문제 때 기년설을 채택하게 한 죄로 이듬해 덕원(德源)으로 유배, 그뒤 여러 곳으로 유배장소가 옮겨졌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게 되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기용되었다가 1683년 벼슬에서 물러나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이 무렵 남인에 대한 과격한 처벌을 주장한 김석주(金錫胃)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비난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도 제자 윤증(尹拯)과의 감정대립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윤증 등 소장파를 중심으로 한 소론(少論)과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장파의 노론(老論)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그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주자학(朱子學)만의 최고의 학문으로 유일시하였으며 예학을 중시했다. 그의 사상은 송익필, 김장생, 김집으로 이어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다. 스승 김집의 뜻에 따라 대동법을 반대하였고 주자에 대한 절대적 신임이 지나쳐 그와 다른 사상이나 경전의 해석을 경계하였고 주자와 다른 사상은 사문난적으로 내몰았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一元論的)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이 과격하여 정적(政敵)이 많았고 스승 김집이 죽고나자 서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그의 문하에서 서인들이 추종하였다. 당시 중앙정치는 서인들의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의 왕권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고 그의 아들인 효종 또한 서인들의 득세로 왕권이 취약했다. 따라서 왕권보다 강력한 집단 세력을 형성한 서인의 의해 정국이 주도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의 영수로 군림하였던 송시열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인조, 효종, 현종, 숙종을 거치면서 점차 높아졌고 관직에 출사않고 지방에 머물면서도 정국의 주도하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고 조선 중기 가장 영향력이 높았던 정치가, 학자로 평가된다.

 

(출처 제공처 : 정보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두산백과)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 《송서습유(宋書拾遺)》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정서분류(程書分類)》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심경석의(心經釋義)》 《사계선생행장(沙溪先生行狀)》 등이 있다.

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제공처 : 정보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송시열 [宋時烈] (두산백과)

 

저작권자 © 코리아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