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코리아플러스】 강경화 기자 = 2021 코리아힐링페스티벌 ‘탑정호’ 걷기 행사를 23와 30일 10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10시 기기재 김상연 선생 유허비가 있는 카페 미뇽 앞에서 개최한다. 지난 16일 행사 사진.

【논산=코리아플러스】 강경화 기자 = 2021 코리아힐링페스티벌 ‘탑정호’ 걷기 행사를 23와 30일 10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10시 기기재 김상연 선생 유허비가 있는 카페 미뇽 앞에서 개최한다.

이 번 행사는 대한민국연안해변지킴이 중앙회(회장 정기일)과 대한민국연안해변지킴이 전국지회(회장 김창종 김진호 류상현)가 주최, 대한민국연안해변지킴이 충청지회(회장 이무복)와 충남 논산지회(회장 김준호, 사무국장 김대중)는 탑정호 둘레길 걷기와 인문학 기행을 갖는다.

정기일 대한민국연안해변지킴이 중앙회 회장은 "티끌하나 없는 삶을 살아간 기기재 김상연 선생의 안천마을과 함께하는 탐정호 들레길 걷기를 전국으로 걷기 열풍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이무복 충청지회 회장은 “코리아힐링페스티벌 충청지역 걷기의 행사인 탑정호 둘레길 긷기를 통해 가을을 만끽하는 행사였다.”고 말했다.

장영래 대표는 "땅 사랑 물 사랑 행사인 탑정호 둘레길 걷기행사를 통해 가을 기운을 만끽하는 행사였다"며 "10월 한달동안 진행되는 탑정호 인문학 기행을 통해 충청의 유교문화를 깊이 사색하는 시간을 갖고있다"고 말했다.

2021 코리아힐링페스티벌 탑정호 둘레길 인문학 기행 걷기 행사는  대한민국연안해변지킴이 충청지회(회장 이무복)와 충남 논산지회(회장 김준호, 사무국장 김대중)가 함께 주관한다.

아울러 인터넷신문 코리아프러스(부회장 노강선)와 코리아플러스(부회장 김창종), 코리아플러스방송(부회장 류상현) 창간 15주년 기념행사로 개최되고 있다.

한편 인문학 기행은 논산의 유교문화를 살펴본다.

김장생[ 金長生 ]1548(명종 3)-1631(인조 9).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김장생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으로 지난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昌陵參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

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과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거쳐 활인서(活人署)·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등의 별제(別提)와 봉사(奉事)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 뒤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인의(引儀)를 거쳐 정산현감(定山縣監)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장생 [金長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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