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된 편지, 한국을 사랑했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편지
기도가 된 편지, 한국을 사랑했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편지
  • 장영래 기자(adjang7@hanmail.net)
  • 승인 2021.11.22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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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선교 유적

【세종=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서만철 회장을 지난 토요일 아침에 세종시 장군면에 위치한 한국선교유적회에서 만났다. 

서만철 회장이 한국셰게선교유적세계유산추진위원회 앞에서 포토 타임을 갖고 있다.
서만철 회장이 사애리시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3.1 독립운동 100주년, 한국을 너무도 사랑했던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의 169통의 편지!”"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의 불씨를 지핀 윌리엄스 선교사의 삶과 사명!" 기도가 된 편지의 저자다.

그는 “그가 남긴 편지는 글마다 사랑이었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그렇게 끈질길 수 없었다. 그 끈질김이 오늘의 한국 교회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서만철 회장

그로부터 우리암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랭크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 한국명 우리암, 1883-1962)는 1883년 미국 콜로라도 주 뉴윈저에서 태어났다. 1906년 덴버대학교를 졸업하고 23세 약관의 나이로 불모지의 땅 한국에 파송되었다.

그는 34년간 감리교 충청 지역 선교 책임자 및 공주 영명학교 교장(초대, 2대)을 지내며, 민족 교육 말살 정책을 펼치는 일제 치하 속에서 한국의 자주 독립과 다음세대를 향한 교육의 불씨를 지폈다. 교육만이 이 나라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일념으로 제대로 된 교육 시설이 없는 충청 지역에 공주 영명학교를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훗날 이 나라의 미래를 밝힐 등불로 삼고자 했다.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3·1 독립운동은 그가 세운 공주 영명학교 학생들과 교사들에 의해 주도됐으며, 이 학교 출신의 명사로는 초대 내무부 장관 조병옥, 초대 충남지사 황인식, 열사 유관순 등이 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는데, 그곳에서도 광복군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고 영국군과 함께 대일 항전을 전개하는 등 통역관으로서 큰 활약을 펼쳤다.

광복 후 그는 미군정 농업정책 고문관으로 다시 한국에 돌아와 복음 전파는 물론 우리나라의 교육과 농업 발전 및 정부 수립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프랭크 윌리엄스 선교사가 이 나라의 민족 교육과 자주 독립을 위해 애써온 내용들을 169통의 편지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재조명하고, 더불어 이 나라를 위해 본인 은 물론 가족의 일생과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한 선교사들의 삶과 사역들을 되짚고 있다.

서만철은 공주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 등산길에서 마주한 오래된 선교사들의 묘지를 보면서 100여 년 전 이 땅을 찾은 그들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당시 최빈국이었던 한국 땅에 와서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명까지 바친 선교사들의 숭고한 삶과 사역이야말로 이대로 잊혀서는 안 되는 소중한 선교유산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현재 그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UNESCO 세계유산 등재’에 기여했던 경험을 살려 (사)한국선교유적연구회를 조직해 몇 안 남은 기독교 선교유산들을 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지구물리학 석사를, 루이지애나대학교 대학원에서 지구물리학 박사를 받았다.

공주대학교문화재보존과학연구소 소장을 거쳐, 제9기 한국문화재보존과학회 회장, 제18대 전국국공립대학교총장협의회 회장, 제6대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2013년 제14회 중소기업기술혁신대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그는 대한민국을 바로 알려면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기간을 살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을 출처로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를 알아본다.

←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15일 →

국기는 미군정청 문장 국가별이 빛나는 깃발(성조기)이다.

수도는 서울특별자유시 서울로 정부 형태는 군정, 입법부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으로 대한민국 국회 군정장관, 사령장관존 하지, 안재홍

역사 • 군정 • 대구 10.1사건 • 제주 4.3사건 •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5년 9월 8일 • 1946년 10월 1일 • 1948년 4월 3일
 • 1948년 8월 15일 까지다.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在朝鮮美國陸軍司令部軍政廳, 영어: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독립한 한반도 남부를 미군 제24군단이 1945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다스리던 기간이었다. 

한국의 역사에서 이 기간을 미군정기(美軍政期) 라고 부른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정부에 통치권이 이행된 후에도 1949년 6월까지 정치고문 및 군사고문의 형태로 존속하였고, 이후로도 대한민국과 미국의 상호관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미국의 남한 통치(1945년 9월 8일)

태평양 전쟁 후반 미국은 단독으로 일본제국과 대치할 계획이었으나 1944년 소련의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은 항복하였고 소련은 청진 등에서 일본제국과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소련은 자신들의 몫으로 한반도를 요구했고, 미국은 소련 세력의 팽창과 일본의 공산화를 우려하여 스탈린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소련은 자신들도 엄연한 참전국 및 승전국, 연합국이며 소련군 사상자와 부상자의 존재를 내세워 한반도 통치를 요구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은 1945년 8월 25일 북위 38°선 한반도 분할점령을 발표하고 미군의 한반도 상륙을 결정한다.

1945년 9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쇼와 천황의 항복 성명을 수용, 일반명령 제1호로 점령지역 연합군의 분할진주를 발표했다. 이어 바로 한반도 남부에 미군을 보내고 일본의 항복문서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국 육군 제24군단을 조선 지역 관할 부대로 정한다. 이때의 남한은 점령지의 성격이었다. 다만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인과 조선인들은 별개로 취급할 것을 특별 지시한다.

9월 8일 존 리드 하지 미육군 중장 휘하의 미국 제24군단은 배편으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파견한 여운홍 등은 교섭을 시도하였지만 하지는 이를 거절하고 정식 정부로 승인하지 않았다. 9월 9일 경성에 도착한 하지 사령장관은 포고령 제1호로 "38°선 이남의 조선과 조선민에 대하여 미군이 군정을 펼 것"이라고 정식 포고하고, 9월 12일 아치볼드 V. 아널드 미육군 소장을 미군정장관에 임명하여 군정을 선포하였다.

9월 12일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들을 파직하고, 당일부로 미군 장교를 각 도의 장관에 임명하여 행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9월 14일부로 조선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를 해임했으나 조선인 출신 조선총독부 고관들은 행정고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용하여 조선의 사정을 파악하게 하는 한편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이용했다. 이때 말단 일본인 관료들은 10월까지 단계적으로 인수 인계 작업을 거친 끝에 해임시켰다.

미군 부처장[편집] 1945년 9월 12일 기준

정무총감 : 미국 육군 대장 해리스,광공국장 : 대령 선. C. 언더우드,경무국장 : 대령 로렌섬,법무국장 : 중령 에미리 J. 우달(Emery J. Woodall)->소령 매트 테일러(Matt Taylor, 11월 20일) -> 김영희(대리, 1945년 12월 10일),재무국장 : 중령 찰스. J 고든,농상국장 : 중령 제임스 마틴 -> 이훈구(李勳求, 1946년 1월 6일),체신국장 : 중령 윌리엄 J. 할리,교통국장 : 중령 워드 L. 해밀턴,학무국장 : 소령 얼. N. 락카드 (학무국장 재직 중 미육군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 -> 유억겸(兪億兼, 1945년 12월 21일),학무국 학무과 성인문해교육계장(1945년 12월 21일)->성인문해교육과장(1946년 1월) : 황애시덕,조선인교육심의위원회 위원 : 안재홍, 유억겸, 김활란,정보국장 : 중령 헤이워드, 식량행정처장 : 지용은(1946년 1월 6일)

한국인 관료 임명[편집]

9월 18일 미군 장교를 각 국장(局長)에 임명하고 9월 19일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원래는 점령군의 성격이었으나 조선인들에게는 점령군이라 하지 않고 일본군을 퇴치한 존재임을 집중 부각, 홍보했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강점기의 악법들은 폐지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통치에 활용했다. 미군정은 처음에 김성수, 김도연, 윤보선, 조병옥, 김병로, 장택상 등 조선인 11명을 미군정장관 고문으로 임명했다가 뒤에 한국인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10월 2일에는 각 국장을 미군 장교에서 한국인들로 교체시켰다. 1946년 9월 12일에는 한국인 부처장(部處長) 20명에게 행정권을 이양했다.

미군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측면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 1946년 1월 1일 신탁통치 반대 운동과 총파업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자 이를 불법 쿠데타로 규정하고 임정에 대한 지원을 줄이고, 그해 2월부터 여운형, 장건상 등의 온건 좌파와 원세훈, 안재홍 등의 온건 우파, 이순탁, 김약수, 노일환 등의 한민당 탈당파 일부를 중심으로 정권 이양을 계획한다. 재조선 미군정청(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은 한국어로 표시를 하였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미제의 남조선군정청(미제의 남조선간섭통치기)라고 불리며 재조선 미군정청을 가리킨다.

한국인 부처장[편집] 민정장관 : 안재홍, 1947년 신설, 군정장관과 동격임, 경무국장 : 로렌섬->조병옥 ->1946년 경무부로 승격한다

수도경찰국장 겸 경기도경찰청장 : 장택상 -> 경무국이 경무부로 승격함에 따라 경무부 수도경찰청장으로 승격한다.

경무국 수사과장 : 최능진 -> 경무부로 승격하면서 경무부 수사국장이 된다.

법무부장 : 이인, 운수부장 : 민희식, 재무부장 : 김도연, 재무부 재산처분국장 : 윤치영, 농림부장 : 윤보선, 학무국장 : 유억겸(유임), 학무국 성인교육과장 : 황애시덕(유임), 인사행정처장 : 정일형, 외무부장 : 문장욱, 군정청 대법원장 : 김용무, 통위부장(국방부장) : 류동렬, 1945년 12월 신설, 감찰위원장 : 정인보, 통역 : 윤치영, 윤노라, 윤광선 외

의회와 삼부 구성[편집],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6년까지 미군정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고 다만 사법부장 겸 검찰국장에 이인, 대법원장에 김용무를 임명해 사법권은 한국인들이 자치적으로 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인들에게 치안권 이양 및 정권 인계를 위해 1946년 10월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여기에 군정청이 임명하는 46명과 각 도에서 주민이 선출하는 민선 의원 46명 등 총 92명의 인원을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으로 선출했다. 이들은 대한제국 중추원이 폐지된 후 본격적으로 활동한 근대적 의회였으며, 초대 의장은 김규식, 부의장은 신익희, 윤기섭이었다. 서울 중앙청에서 과도입법의원이 개원할 때는 애국가가 공식으로 행사에 처음 사용되었다.

1946년부터는 형식적으로 한국인 민정장관 안재홍을 임명해 행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최고 통치자 및 4부 요인

최고 통치자 : 존 하지, 행정 수반 : 안재홍, 과도입법의원 의장 : 김규식, 부의장 : 신익희, 윤기섭, 최동오, 대법원장 : 김용무, 검찰총장 : 이인, 감찰위원회(감사) 위원장 : 정인보

좌우합작 정책[편집]

1946년 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신탁통치문제를 국내의 좌우합작으로 해결하고자 시도, 미군정 고문 L.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김규식·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추진되었다. 여기에 조선공산당에 타격을 주고자 조봉암 등의 1차 탈당, 여운홍, 장건상 등의 2차 탈당을 유도하고 이들을 좌우합작세력에 가담하게 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 등의 계속된 암살과 학병동맹원 피살 사건, 정인수군 피살 사건, 윤명선 피살 사건, 대구 10월 사태, 조선공산당 테러 사건, 인민일보 테러 사건 등으로 조절은 어려워졌고,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도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 좌우합작을 통한 신 정부에 정권을 이양하려던 미군정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또한 미군정에서 극우파로 배격하던 이승만 역시 미군정을 무시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과 직접 상대하거나 미 국무부 내의 프린스턴 대학교 인사들,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을 이용하여 좌우합작을 좌파에 유리한 정책으로 공격함으로써 미군정을 압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철수[편집]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미국은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서 유엔 총회의 결의하에 해결하려는 정책으로 전환되었다. 1948년 1월 UN의 한국임시위원단이 한반도를 방문, 미군정은 방문을 수용했으나 소련 측에서는 방문을 거부함으로써 그 해 2월 한국의 가능한 지역(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이 UN에서 가결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어 국회가 구성되었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9월까지 윤치영, 조병옥 등의 실무자들을 통해 정권을 이양했고, 10월부터는 대한민국 정부의 군사 고문 겸 정치 고문으로 활동하다가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미 군정은 제24군단장이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을 겸직하였다.

주한미군사령관 예하에 군정장관실과 주둔군 24군단 본부로 나뉘고, 24군단 본부에는 군단예하 군수지원사령부(ASCOM), 본부대(전술군), 6사단, 7사단이 소속되었고 군정장관실 예하로는 참모장과 직속참모기관인 정치고문실, 중앙경제위원회, 중앙식량행정처, 중앙물가행정처의 직할 3처와 체신부, 문교부, 재무부, 운수부, 공보부, 농무부, 상무부, 법무부, 문교부, 경무국(경무부로 격상), 통위부의 부와 인사행정처, 관재처, 기획처, 외무처, 회계처 등의 5처로 나뉘었다.

역대 지도자[편집] 사령관[편집] 존 하지 (John R. Hodge), 1945년 9월 8일 ~ 1948년 8월 26일 존 코울터(John B. Coulter) 1948년 8월 27일 ~ 1949년 1월 11일

군정장관[편집] 아치볼드 빈센트 아널드 (Archibald V. Arnold, 1945년 9월 11일 ~ 1945년 12월 17일), 미 육군 소장, 대리, 제이 알 쉬츠(J. R. Sheetz), 1949년 9월 29일, 미 육군 대장, 아서 러치 (Archer L. Lerch, 1945년 12월 18일 ~ 1947년 9월 11일), 미 육군 소장(재직 중 사망), 찰스 핼믹(Charles G. Helmick, 1947년 9월 12일 ~ 1947년 10월 30일), 미 육군 준장, 직무대리, 윌리엄 F. 딘 (William F. Dean, 1947년 10월 30일 ~ 1948년 8월 15일) 미 육군 소장, 찰스 핼믹(Charles G. Helmick, 1948년 8월 15일 ~ 1949년 1월 11일), 미 육군 소장, 안재홍(安在鴻)은 1947년 10월 30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민정장관을 맡았다.

민정관[편집]브라이나드 E. 프레스코트(Brainard E. Prescott) 1945년 9월 11일 ~ 1946년 1월 2일,메티카스 W. 메이(Metticus W.May) 1946년 1월 3일 ~ 1947년, E. A. J. 존슨 1947년 ~ 1948년지방 행정장관[편집] 각 행정기관 관리 업무를 담당하였다.

윌리엄 B. 마이어스 1945년 10월 2일 ~ 194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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