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주위에는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

수년동안 3종암과 투병하면서 참빛교회담임목사 과 CBS방송설교,대전교도소지도목사를 쉬지않고 섬기고 계신 오세윤목사(사진) 암을 이겨내면서 격은 사연을 소개했다.
수년동안 3종암과 투병하면서 참빛교회담임목사 과 CBS방송설교,대전교도소지도목사를 쉬지않고 섬기고 계신 오세윤목사(사진) 암을 이겨내면서 격은 사연을 소개했다.

【간증의삶 】2021년 신축년 이야말로 유독 다사다난했던 코로나-19의 한 해라 생각하며 서서히 저물어 가는 군요.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네요. 내년에는 시원하게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다시 평범하고 소중하고 귀중한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님께 저희 버릇처럼 인사드립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하고 존귀한 78억분의 1입니다.오직 이 지구촌에 한분밖에 없으므로 그 어떤 보석보다 귀하고 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소중하고 귀중한 독자께서는 부푼 꿈을 안고 맞이한 이 한해도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듯 속절없이 저물어 간다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며칠 있지 않으면 2022년은 임인년(壬寅年), '검은 호랑이'의 해라합니다. 2019년 11월에 시작한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확산한지 4년차가 되는 해이기도 하군요.

한해의 끝자락에 서게 되면 늘 생각하는 것은 춘하추동이 어느 것이 시작인가 생각도해보고 닭이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에서 진화론보다 오직 창조를 믿음으로 닭이 먼저임을 확정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생각할 것은 없으며 사계절이 모두 좋다라고 생각합니다.현재 우리는 위드 코로나(With Corona)시대로 코로나와 함께 감으로 더불어 살아감에 다시 한번 두 주먹을 힘 있게 쥐어봅니다.저는 뇌종양 암으로 1999년 12월 밀레미엄 시대로 가는 날에 병원 측에선 의료기계의 오동작 두려움으로 2000년에 수술하기를 원했으나 양자택일이 있었으나 저는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은 내 뜻은 아님으로 처음 정해진 12윌 30날로 하자하여세계적 밀레미엄의 문제는 없이 지나가고 저 또한 무사히 마침으로 이 순간 살아있음에 감사를 날마다 감사를 드린답니다. 이어서 저는 2015 년까지 연골육종암, 후두암, 뇌암을 4회나 실시하여 오직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그러므로 저에게 주어진 삶은 내 뜻이 아님을 인식하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 갈 길을 달려가는 두 암소의 눈물이 있더라도 2021년을 뒤로하고 2022년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다가오는 한해엔 한해의 365일을 반석으로 내속에 가다듬고 그 집을 세워가길 원합니다.

우리들의 주위에는 종교적이든 비종교적이든 죽음과 사후세계를 준비하라고 합니다.

"인생은 B(Birth)로 시작해서 D(Death)로 끝난다.”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싸르트르(1905-1980)가 남긴 유명한 말이기도 합니다. 굳이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시도 멈추지 않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문제는, 인생은 과연 B (Birth) 플러스 D(Death)로 끝날 것인가? 이런 것은 단지 믿지 않는 불신자들의 통상적인 사후관념일 것뿐입니다.그러므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가리켜서 사망(死亡)이란 단어를 씁니다. 사망이란 단어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사망, 죽을 사(死)자, 망할 망(亡)자, 즉 ‘죽음’이란, ‘죽고 망한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믿는 사람 중에서도 사후의 세계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내면에도 역시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이 깔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에서 도피하는 길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독자님들 ! 저는 대전 CBS에서 2년 넘게 방송을 하고 있는데 그 방송 중에서 가장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중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올려봅니다. 3번이나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신약성경 27권 260장 7,957절중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총 35회의 이적과 치유사역을 하셨는데 그중에 치유사역이 26회로 전체 사역 중 74퍼센트를 차지함에 역점을 두신 것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이적과 치유사역을 진정한 마음으로 모든 목회자님들과 성도들이 알기를 원하심에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26회 치유사역 중에서 3번의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에 대하여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시기를 바랍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죽은 자를 살리신 기록은 총 7번입니다.

구약에선 2회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왕상 17:21~22)과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심(왕하 4:35)입니다. 신약에선 총 5회로 예수님께서 3회로 나인 성 과부의 아들(눅 7:13~15), 회당장야이로의 딸을 살리심(막5:40~42),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심(요 11:43~44)절이고 예수님외 베드로와 바울은 1회씩으로 베드로는 여제자인 다비다를 살리심(행9:40)이고 바울은 유두고를 살리심으로(행20:12)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예수님의 3회의 살리신 사역을 전하실 원합니다.

1.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누가복음 7: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2.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 마태복음 9: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가복음 5: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누가복음 8:54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3.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요한복음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 첫 번째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하인의 병을 고치시고 아래지방으로 나인 성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제목의 주된 내용은 나인 성의 한 과부, 나인에 사는 섬김의 손길들, 죽은 과부의 아들이 등장인물과 배경입니다. 물론 그곳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성경의 나인(Nain)이라는 뜻은 “아름답다”입니다. 그곳은 나사렛 남동쪽 9.6km지점이고, 가버나움에서는 남서쪽으로 40km지점에 위치한 갈릴리 지방의 한 성읍으로 사마리아와 근접한 마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고 아래쪽으로 가셔서 나인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상여를 메고 나오는데 그 뒤에는 여인이 따르고 그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라 옵니다. 그 죽은 사람은 나인성에서 혼자 살고 있던 한 믿는 여자의 외아들이었습니다.이 어머니에게는 아들의 소망의 전부요, 기대하는 바의 전부였고, 자기 생활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그러니까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나인 성 과부의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살려주신 세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인 성 과부의 아들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고 세 번째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리셨던 것입니다.그리고 이 세 번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나인 성 과부의 아들에게 “일어나라“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에게는 일어나자 ”잔다“라고 하신 것을 보면 두 딸들과 나사로는 믿음이 신실함으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면 평안한 잠을 자다가 예수님 재림 때 천국에 감을 3번씩이나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과부가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표현될 때가 많습니다. 구약성경에 사르밧의 과부, 빚으로 두 아들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선지자 생도의 과부 아내, 그리고 신약의 과부 성도가 자기 남편의 원수를 법관의 도움을 받아 기어이 갚고 말았다는 비유와 또 본문에 나오는 나인 성 과부 이야기가 하나같이 큰 은혜 즉 갑절의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과부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의 표상 또는 표본으로 나타날까요? 과부는 항상 갑절이나 고생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편 있는 사람은 어머니와 아내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과부는 아버지와 남편 역할까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고행해서 아들 딸 키워 놓으면 나중에 가서 영광이 배나 되는 것처럼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갑절이나 고생해야 합니다.

어머니는 강합니다. 그러나 과부는 참 약합니다. 어찌나 잘 우는지 보통 하는 말에도 눈물을 잘 흘리기 때문에 과부는 약자의 상징입니다.그러나 '나는 강하다, 못할 것이 없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필요 없다라고 판단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약하다, 나는 하나님 안 믿고는 단 하루도 못산다.' 이렇게 자기의 나약함을 아는 사람일수록 예수를 잘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 믿습니다.아들을 잃어버렸으니 더 이상의 불행을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불행을 당하고도 이 과부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굳건하게 믿음을 지켜 나갔다고 하는 사실을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불행을 당하면 하나님을 한 번쯤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 불행 중에도 끝까지 지킨 믿음 때문에 문제를 해결 받게 되었던 것처럼 훌륭한 신자는 이렇게 독자를 잃은 불행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도도 한마음이 되리라 믿습니다. 이 나인 성의 과부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자살해 죽겠다는 것까지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묵묵히 믿음을 지켜 나간 것입니다. 이 믿음이 나중에는 그 불행의 문제를 다 해결하고 엄청난 주님의 사람과 축복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불행, 저런 불행 겹겹이 닥쳐와도 낙심하지 아니하고 불행을 믿음으로 이긴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불행과 역경이 겹겹이 온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갑절의 영광과 주님의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런 와중에 1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그러나 많 사람들은 도움을 받는 다면 괴롭다 할 수도 있습니다. 쪽팔린다하기도 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의 도움, 예수님의 도움은 받으면 받을수록 모든 사람이 부러워합니다. 또 영광스럽습니다.주님의 도움은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그 진실한 영광스러운 도움의 손길이 15절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할렐루야!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 부족한 종의 목회지에서는 이렇게 힘든 가운데 생활하시는 성도들이 있습니다.세원이 지나고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기도하며 달려갈 길 달려가는 벧세메스롤 가는 두 암소와 같다라고 저는 표현하고 싶답니다.

정말 수고 하셨고 수고하십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인 성 과부처럼 어떤 경우에도 굴하지 않는 신자, 주의 도움을 받는 신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두 번째로 2. 회당장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입니다.예수님께서는 전 주에 말씀 들였듯이 회당장야이로의 딸을 먼저 고침 받아야 하는데 12년 동안 혈루 증으로 고생하는 여인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므로 고쳐주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그 시절에 권위가 있는 12세의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주민들의 비웃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가셔서 황당하게 아이가 잔다라고 하셨습니다.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이 방에 들어가 ‘달리다굼“하셨습니다. 이말은 아람어로 ”달리다“는 ”일어나다”이고 “굼”은 명령어입니다.

그러므로 자세히 해석을 하면 ”소녀야 일어나라“입니다.예수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공관복음서의 공통된 기록입니다.율법적으로는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타는 일이었습니다(레 21:11).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것에 얽매이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핵심이 바로 사랑이었으며, 죽은 자가 예수님께서는 죽은 시신이 아니라 산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깨우시고 '먹을 것을 주라' 하셨습니다.소녀는 오랫동안 아파 왔기 때문에 그 동안 제대로 먹지를 못했을 것입니다.그의 부모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서 있었고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던 것이고 올바른 가정으로 회복케 하여 주셨습니다.오늘 말씀으로 죽음을 잠으로 본 예수님은 성도에게 있어 죽음은 잠간의 이별일 뿐입니다.예수님의 26회의 치유사역 중에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9번째로 나인성 과부의 외동아들을 살리심과 13번째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과 세 번째인 23번째로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이 세가지의 중요한 공통점은

청년아 일어나라! 소녀야 일어나라! 나사로야 나오라!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이것은 곧 믿는 자의 죽음은 “잔다”라는 것입니다.우리 곁의 모든 죽음은 우리의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 안에서 잠들었다면 지나치게 낙심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신실한 믿음의 성도들의 죽음은 “잔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에는 영적인 잠과 사망으로 구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 산다고들 말하지만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런 사람들의 특성은 살았다 하나 죽은 자들입니다.그리고 그들은 곧 불신자, 이단, 사이비들을 말합니다.이 부족한 종은 장례예배를 수시로 드립니다.장례식장에 갈 때는 꼭 하얀색 넥타이를 매고 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죽음을 맞이한 것은 잠시 기다렸다가 부활하여 천국에 가게 됨을 기다리는 장례예배이기 때문입니다.세 번째로3. 죽은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두 말 할 것 없이 ‘죽음’입니다.죽음은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죽음이 찾아오면 한 마디로 속수무책입니다.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혹시 가사 상태나 기절 상태로 있다가 깨어나는 일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완전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그런데 본문에 보니까 나사로라 이름하는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가 예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의 26회의 치유사역 중 세 번의 죽은자를 살리셨습니다. 첫번째로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셨습니다. 둘째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세 번째로 오늘 4복음 중에서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본문의 죽은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죽은 자를 살린 세 번째 중 마지막으로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에게 교훈을 주십니다.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지체하신 예수님입니다.당시 나사로가 살던 곳은 예루살렘 근처로 베다니 마을입니다.예루살렘에서 약 5리(요11:18)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들르셨던 곳입니다. 그 마을에 사는 나사로와 그 누이 마리아, 마르다는 예수님과 절친한 사람들이었습니다.그런데 예수님이 먼 데 떨어져 계시는데, 베다니 마을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나사로가 중병에 걸려 죽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가 위급하니 속히 오시라는 뜻입니다.이러면 예수님께서는 가능한 한 가장 빠른 방법으로 나사로에게 달려가야 합니다.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당장 달려가야 이야기가 되는데, 그곳에서 이틀을 지체하셨다는 겁니다.그뿐이 아닙니다.이틀 후에 출발한 후에도 여전히 서두르지 않습니다.베다니 마을에 당도한 후에도 서두는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그러면 예수님은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셨습니다.일부러 시간을 지연하셨다는 겁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타이밍을 맞추시기 위함이었습니다.예수님이 도착하신 시각이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안치된 지 이미 나흘이 지났을 때라고 했습니다.

일부러 그 시각을 맞추신 것입니다. 주여~~구체적으로 이것은 지금 제자들도, 마르다와 마리아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만 아직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제한적입니다.예수님이 미리 오셨으면 병을 고쳤겠지만 이제 죽었으니 다 틀렸다는 뜻입니다.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신 예수님입니다.나사로와 주위 사람들을 심히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요한복음 11:35절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여기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흐느껴 우셨던 것 입니다.예수님은 몸소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체험해 보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3위 일체 되신 하나님의 사역 중에서 세 명의 인간적으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주님 보시기에 부끄럽기 짝이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서의 죽음은 곧 께어 날 잠을 자는 것임을 확신을 가지고 믿어야 될 줄 믿습니다.

달려갈 길 달려갈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독자님들께서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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