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코리아플러스】 김서현 기자 =  호수돈 여자중학교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위에 여성이 배우고 의식이 깨어나야 이 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던 갈월선교사(Arrena Carroll, 미국 남감리회 홀스톤 연회 소속)에 의해 시작됐다.

【대전=코리아플러스】 김서현 기자 =  호수돈 여자중학교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위에 여성이 배우고 의식이 깨어나야 이 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던 갈월선교사(Arrena Carroll, 미국 남감리회 홀스톤 연회 소속)에 의해 시작됐다.

 갈월선교사는 한국선교에 대한 뜻이 있어 이미 미국 본토에서 한국어를 습득했고 미남감리회 한국파송 세 번째 여성 선교사로 1898년 9월 서울로 오게 됐으며 그해 11월 개성으로 넘어오게 됐다. 당시 송도지역을 관할하던 콜리어 선교사의 부인이 어렵게 운영하다 결국 건강악화로 포기해 버린 학교사업을 이어받아 1899년 12월 19일 12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개성에 쌍소나무집이라 불리던 작은 초가를 구입하여 개성지역에 최초 기숙 여학교인 ‘개성여학당(1904년 12월 12일)’을 설립했는데, 바로 호수돈 여학교(1908년 교명 개칭)의 효시이다.

당시 호수돈 여학교는 4년제의 보통과와 3년제의 고등과로 설치돼 신여성교육과 남녀평등사상 등 의식화교육에 주력함으로써 한국여성의 시대변화를 인식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11년 조선교육령 발표이후, 일제의 식민교육정책과 민족말살정책이 더욱 강화되자 이에 우리민족은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전 민족적 3.1만세운동으로 저항했는데, 개성지역에서는 호수돈 여학교의 ‘호수돈 비밀결사대’가 주목된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호수돈 여학생의 주도로 조직된 비밀결사대였다. 권애라, 장정심 조숙경이 핵심멤버로, 이향화, 권명범, 이영지, 류정희, 조화벽, 김정숙 등이 주도했다.

당시 권애라는 호수돈 부속 남부소학교 교사, 어윤희는 인근의 충교 예배당 전도부인으로 독립선언서 200장을 배포했던 교회청년 안병휘등과 긴밀한 교류를 하면서 호수돈 여학생의 3.1만세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저녁시간 교내 4층 기도실에서 밀회를 가지며 거사준비를 시작했다. 이들은 극비리에 기숙생 70여 명을 포섭해 연명선서를 만들었고, 커튼으로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세시위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거사일 3월 3일. 호수돈 비밀결사대원은 퇴학원서를 써놓고 학생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헌병경찰서 앞으로 자연스럽게 행진을 하는데, 그때 한 학생들이 민족자결주의를 연설한 뒤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기 시작했다. 이어 여학생들과 동조하는 개성시민은 순식간에 합세하며 1,000여 명 규모의 군중으로 결집됐다.

이날 만세삼창의 외침은 일본 경찰과 개성시민의 충돌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시민의 울부짖음으로, 개성시내의 허공을 메웠다. 그렇게 개성지역 만세외침의 시작은 바로 꽃다운 여학생의 손에서 시작됐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개성 여학생의 순수한 민족정신의 상징이다. 전통과 근대, 탄압과 저항 속 여학생의 외침이 일제 강압을 뛰어넘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 민족저항운동의 시발점에 섰다. 바로 민족을 향한 순수함과 나라사랑정신이 함께 표출된 것이었다.

여학생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행보는 강원도 최대민족운동인 양양만세운동등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일대의 만세운동으로 확산되어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또 하나의 광복을 향한 초석이 됐고,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정신은 시대를 넘어서서 오늘날까지 큰 귀감이 되고 있다.

호수돈여자중학교는 갈월선교사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시작해 12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갈월(한국명 갈월(葛月), 영어명 캐롤(Carrol))은 미남감리회 한국파송 세 번째 여성 선교사이며 한국에서의 선교에 큰 뜻이 있었기에 미국 본토에서 이미 한국어를 습득했다.

그녀는 지난 1898년 9월 서울로 오게 됐으며 그해 11월 개성으로 넘어오게 됐다. 1899년 12월 19일 12명의 소녀들을 데리고 개성에 쌍소나무집이라 불리던 작은 초가를 구입하여 송도의 여성교육을 개척했다.

그리고 뒤이어 2대 교장인 왕래(E. C. Wagner) 선교사가 홀스톤지방의 부인협회 선교헌금과 왕래 선교사의 친구인 스탈리(T. F. Staley)박사의 후원(당시 미화 5,000달러)을 받아 1909년 ‘홀스톤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당시 개성여학당(호수돈의 전신)은 건축기금을 보내준 홀스톤지방의 이름을 빌려 ‘호수돈’이라는 교명을 사용했으며 개교기념일도 5월 15일로 기념하고 있다.

작고 초라했던 쌍소나무집 학교가 자라 개성에 웅장하고 내용이 충실한 학교로 발전했으며 이후 잠시 명덕 여학교로 개칭했다가 1953년 6.25동란을 계기로 대전에서 재 개교했고 1954년 호수돈여자중고등학교로 분리했다.

일찍이 신교육을 받은 호수돈의 학생과 교사들은 백성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횃불이 됐고, 일제치하 우리 민족이 주권을 잃었을 때에 나라를 구하는 민족운동의 주역이 됐으며 학교에서 갈고 닦은 나라사랑의 정신을 사회에 나가 실천한 봉사자들이 됐다.

19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열사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펼친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개성만세운동과 양양만세운동등 강원도와 황해도 일원의 만세운동등을 주도한 호수돈 출신 졸업생들과 호수돈비밀결사대에 대한 평가도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민족 운동가 도산 안창호선생은 호수돈을 “어느 여학교와 비할 데 없이 조선의 딸로 길러주는 학교”라고 언급할 정도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고 민족운동을 활발히 한 학교였다.

1954년 4월을 문교부 허가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된 이후 호수돈여중은 남을 위해살자 라는 교훈과 봉사하는 여성, 품위있는 여성, 슬기로운 여성, 건강한 여성 등의 교육목표를 실현하며 120년의 명문 사학의 전통을 이어가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호수돈여자중학교는 바른 인성과 7대 핵심역량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고 있는 대전 중등 교육의 산실로서 오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다양하고 차별화된 교육 활동으로 대전 명문사학으로 도약하고 있다.

호수돈여중은 학교폭력이 없는 모두가 안전하고 모두가 즐겁고 행복한 학교로 다양하고 특색있는 교육과정 운영과 바른 인성교육 함양을 위하여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호수돈여중 만의 차별화된 특색 교육활동으로는 첫째 약 70명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반과 피아노교실 운영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1인 1악기 익히기 특색사업을 실시하여 문화예술 감성을 함양하고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둘째, 온라인 콘텐츠 활용 교과서 선도학교, Google Apac Research Program 구글 연계 크롬북 활용연구학교, 창의인재씨앗학교, 좋은수업나눔 교실 운영등을 위하여 1인 1크롬북이 지급되어 메타버스를 플랫폼으로 하는 혁신역량을 길러주는 미래교육이 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셋째로 천연잔디구장과 감성숲등이 조성된 아름다운 교정과 학교 도서관, 강당, 음악실 오케스트라실 컴퓨터실 등 각종 최신 특별실이 구비되어 있어 모든 학생들이 쾌적한 교육환경 속에서 즐겁고 행복한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호수돈여자중학교는 일제 강점기 어두운 역사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되어 우리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새로운 사회를 여는 일에 헌신한 인재들을 길러낸 전통을 이어받아 앞으로는 대한민국을 뛰어넘어 세계를 가슴에 품고 더 배려하고 창의적이고 슬기롭고 품위있는 여성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아 대전교육을 선도하는 명문학교로 계속 발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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