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월남 이상재 선생의 시대정신, 천광노 회장
표용은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
이남기 청남 회장, 이다연 예청 대표이사

【공주=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이용환 공주영명중고등학교 교장이 김병돈 이사와 김용휘 부장에게 학교신문 편집방행에 대한 의견을 밝히고 있다. / 장영래 코리아플러스 기자 

【공주=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빠름보다 바름을 실천한 민족의 스승 영원한 청년·월남 이상재 선생의 전기를 시간이 나면 읽는다. 월남 이상재의 전기 작가인 천광노 이사장의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코리아플러스방송 회장으로 활동하는 모습 때문이다. 그는 바름을 실천하기에 더욱더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천광노 대한민국평생학습지원센터 이사장 시절에 천광노 이상재 선생 전기 작가를 따라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 YMCA 별관에 위치한 초라한 재단법인 월남 이상재 기념사업재단을 찾았다. 천광노 이사장은 3·1운동의 시작은 이 곳이라며 ‘3·1운동 기념터 : YMCA’ ‘이 곳은 3·1운의 본거지로 3·1독립운동을 준비 했던 곳’이라고 쓰여 진 곳 앞에서 오공임 코리아플러스 대표와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최근에는 표용은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이사장을 만나 동경의 2·8독립선언이 3·1운동의 시발점이 됐다는 사실을 들었다. 우리가 3·1운동은 알면서 2·8독립선언을 모르는 것을 안타까워 했다. 특히 한국 YMCA가 일본 YMCA를 만들어 이 당시 많은 젊은 청년들은 몸은 일본에 있었지만 마음은 조선의 독립을 갈구했었던 마음을 전달했다. 독립운동의 국내모사 주동인 최인(崔麟), 송진우(宋鎭禹), 최남선(崔南善), 현상윤(玄相允)과 만나 동경 상황을 제보함으로써 일대 거사의 시운을 합류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최남선이 나서서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1864-1930)과 교섭함으로써 민족대동단결의 독립운동이 거사될 수 있었다. 1918년 12월 1일 도쿄에서 발행되는 ‘Japan Advertizer'라는 영자신문이 “미주에 있는 조선인 중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 등 세 사람이 조선민족대표로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고, 그 달 15일 일본의 아사히신문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자금으로 30만원을 모금하였다”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런 보도로 유학생들의 마음은 흥분됐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운동이었다. 그해 12월 하순 재일한국YMCA에서 학우회 주최로 웅변대회를 열게 됐다. 많은 학생들이 운집했다. 연사로 나온 학생들은 민족자결의 원칙아래 우리 민족도 반드시 자주독립을 획득해야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본유학생들이 앞장서서 결사적으로 싸워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웅변대회가 끝난 뒤 최팔용, 백관수, 김도연, 송계백, 이광수 등이 대표위원으로 뽑혀 독립운동 방안을 연구하게 됐다. 이 대표위원들은 한 달 이상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이곳저곳에서 의논을 거듭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계획 중의 하나가 2월 8일을 기해 한국YMCA에서 학우회총회를 한다는 구실로 집회를 가지고 ’조선청년독립단‘의 발기대회를 열고 독립선언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유학생들만이 할 것이 아니라 전 민족이 다 같이 하게끔 국내와 상해에 연락원을 파견키로 결정했다. 예정된 2월 8일이 됐다. 수많은 정사복의 경관들이 삼엄하게 경계망을 펴고 있는 가운데 오후 2시 총회가 열렸다.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하자 최팔용이 재빨리 긴급동의를 하면서 단상에 올라가 조선청년독립단의 발족을 선언해 만장의 박수를 받고 이어 백관수가 준비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했다. 이어 서 춘이 선동 연설을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가려 할 때 그때서야 사태를 알아차린 일본경관들이 해산명령을 내려 흥분된 학생들과 경찰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때 많은 학생들이 연행 구속됐다. 2․8선언이 일어나기 전 1918년 12월 초순에 유학생들은 송계백을 밀사로 국내에 파견해 세계정세와 일본유학생들의 동향을 보고하고 독립운동을 일시에 벌일 것을 주장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는 YMCA를 중심으로 선교사들과 외국인을 통하여 윌슨대통령의 제안을 듣고 웅성거리고 있는 때였다. 특히 YMCA의 간사 박희도는 1919년 1월 23일경 YMCA 회원인 연희전문학생 김원벽과 의논하고 각 학교 대표들을 시내 대관원에 초치해 국내의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자는 움직임이 무르익고 있었다. 동경에서 일어난 2․8선언이 재일YMCA와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바와 같다. (2003년 서울YMCA 창립 100주년위원회 정리) 출처: https://yunheepathos.tistory.com/1395 [이윤희/YunheePathos]

지난 월요일 공주영명중고등학교 학교신문을 만들어 3번째로 배달했다. 학교신문을 코리아프러스와 코리아플러스, 코리아플러스방송과 대한민국평생학습지원센터가 올해로 8년째 만들고 있다. 한 학교 한 학교 신문을 만들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선열들의 힘겨운 노고가 우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안에 정신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특히 청년 이상재의 삶의 흔적들이 이 곳 저곳에서 살아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음을 깨닫는다. 박찬호 야구선수를 길러낸 공주중학교 신문을 만들면서 월남 이상재 선생이 야구를 한국에 도입 한 것을 알게 됐다. 학교신문을 만들어 나갈 이유기 여기에 있다. 아울러 청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번 호는 이남기 청암 회장과 이다연 예청 대표이사의 장학금 기부로 신문이 만들어져 그 의미를 더했다. 올해는 초등과 중등교육기관인 중학교와 고등학교 신문을 넘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신문을 만들겠다는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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