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코리아플러스방송】 장영래 기자 = 섬진강 대가야 유적을 찾아 전북도 남원과 장수지역에 대가야 문화유적을 알아본다. KBS 약사스페셜을 참조해 알아본다.

5세기 고령의 대가야는 낙동강을 통해 전북 부안군에 통로를 이용했다.

전북 부안군은 중국 교역로 였다.

하지만 신라의 영향으로 섬진강을 이용한 전북 부안을 가기위한 섬진강 지역을 이용한 초반의 가야문화는 전북도 고령에서 남원, 진안, 장수군 지역의 봉수대를 알아본다.

섬진강 하류인 하동지역을 거쳐 남해안으로 고창, 부안지역의 해상을 이용한 대외교역 루트 였다. 

일본은 섬진강의 해상 루트였다.

6세기 초 대가야와 백제의 선짐강 루트를 확보키 위한 대외교역로 였다.

백제와 신라의 전투에서 대가야는 멸망한다.

한편 지도로 보는 한국사 나제동맹의 변천 시대5세기~7세기를 알아본다.

고구려의 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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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제 동맹의 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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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제 동맹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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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백제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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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백제, 신라는 특정한 나라가 강해지면 자기 보호를 위해 다른 나라와 연합하며 위기를 타개했다. 5세기 이후 고구려의 활발한 남진정책은 백제와 신라, 가야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신라는 겉으로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완전한 독립을 도모했으며, 고구려에게 철저히 유린당한 백제는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백제와 신라는 오랫동안 전쟁을 했던 나라지만 강대국 고구려를 막기 위해서는 연합해야만 했다. 두 나라의 연합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신라가 백제를 돕기 위해 군사를 보냈을 때부터였다. 그 뒤 475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일 때 신라는 군사를 보내어 돕고자 했으나, 이미 전쟁이 종료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백제의 개로왕이 나라를 구할 마지막 비책으로 신라에게 구원요청을 하였고, 또 1만 명의 신라군이 도착한 것은 양국에게 의미 있는 일이었다.

이후 양국은 485년과 493년, 494년을 비롯해 여러 차례 연합하여 고구려의 공격을 막았고, 때로는 가야의 병사들도 합류했다. 492년에는 양국간의 혼인이 성립하기도 했다. 양국은 협력을 통해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정된 나라를 만들 수 있었고,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해 가야연맹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신라는 548년에도 백제에게 원군을 보내주었고, 551년에는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나누어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553년에 신라가 돌연 고구려와 화친하고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를 분하게 여긴 백제 성왕은 신라에게 배신의 죄를 물으려 했으나 기습을 받아 죽고 말았다. 백제 성왕의 죽음으로 사기가 충천해진 신라는 약 3만에 이르는 백제군을 전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으로 백제는 신라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되었고, 곧 양국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렇다고 평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600년에 왕위에 오른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의 결혼으로 잠시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양국의 끊임없는 공방은 계속되었다. 양국간에 과거 동맹관계의 회복은 이제 불가능해졌으며 상대의 파멸만을 원하는 전쟁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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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지도로 보는 한국사 | 김용만 외 | 수막새, 역사는 언제 전개된 것인가도 중요하지만, 왜 그 장소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역사의 공간적 범위와 지리로 한국사 전체를 크게 되짚어 본다. 한국사 전반..펼쳐보기)

다음은 (가) 문주왕의 웅진천도 ( 475년 10월(음))내용이다.

문주왕(文周王) 은 개로왕의 아들이다

처음에 비유왕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문주가 그를 보좌하여 직위가 상좌평에 이르렀다. 개로왕 재위 21년에 고구려가 침입하여 한성을 포위하였다. 개로가 성을 막고 굳게 수비하면서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토록 하였다. 그는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다.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으나 성이 파괴되고 왕이 사망하여서 문주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격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또한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들도 그를 사랑하였다..........원년 겨울 10월에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

웅진천도와 정정의 불안(문주왕,475~477)

개로왕 21년(475)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불의에 왕도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무렵 개로왕의 동생인 文周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 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중이었으나 이미 고구려군은 퇴각하였고 개로왕은 참살당한 상태였다. 이에 문주는 왕위에 오른 후 10월에 祖彌桀取·木協滿致와 같은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부득이 남쪽의 熊津(公州)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공주지역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아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 남쪽에는 곡창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關防뿐만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문주왕의 웅진천도는 고구려군의 침공에 의해 갑작스럽게 행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웅진은 우선 고구려의 직접적인 예봉을 피할 수 있고, 또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기 때문에 새로운 왕도로 선정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웅진시대(475∼538)의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웅진천도는 개로왕이 패사한 지 불과 한 달만에 임기응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웅진이 새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먼저 옛 왕도인 한성에서 옮겨 온 민호들을 귀족세력의 통제하에 일정지역에 분산시켜 수용·정착케 하는 일부터 착수하였다. 문주왕 2년(476) 2월에는 남으로 옮겨온 한성민호를 아산에 있는 大豆山城과 직산의 慰禮城 등에 거주케 하였다. 이와 같이 유민들을 새 왕도와 그 부근에 안치시킴으로써 뜻밖에 천도로 빚어진 혼란을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이어 새 왕도인 웅진성 안의 궁전 및 여러 정청 등 지배층을 위한 시설물들을 갖추어 나가는 일에 착수하였다. 웅진천도가 상당히 위급한 정황 속에서 불과 한 달만에 이루어졌고, 또 성왕 4년(526)에 웅진성을 처음「修葺」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감안해 보면 왕도의 중심성인 웅진성을 새로 신축할 겨를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천도 직후에는 기존의 성곽시설을 그대로 활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현재 2,660m에 이르는 包谷式의 공산성 중에서 현존하고 있는 테뫼식의 토성 부분이 당시의 웅진성의 규모로 추정된다.205) 웅진성 안의 궁실은206) 문주왕 3년(477)과 동성왕 7년(485)에 걸쳐 중수되었는데, 南堂과 臨流閣 등 부속 시설물들이 하나씩 조영됨에 따라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새 왕도의 건설을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웅진천도 직후의 정치상황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천도 초기의 백제는 한성의 함락과 한강유역의 상실, 개로왕 직계왕통의 단절 등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권신의 발호와 세력다툼, 이로 인한 왕권의 실추 등으로 이어져 일련의 정정불안이 야기된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문주왕(475∼477)은 맏아들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하고, 아우인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에 임명함으로써 개로왕 직계왕통의 단절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왕위계승상의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문주왕은 당시 정치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발호를 제어하지 못하다가 그에 의해 재위 3년만에 살해되고 말았다. 해구는 문주왕 2년에 천도 직후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틈타 병관좌평에 오르면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대두하였다. 그 동안 취약한 왕권을 보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내신좌평 곤지가 이듬해 7월에 사망하게 되자 실권을 장악한 해구는 마침내 정치적 배경을 상실한 문주왕을 시해한 다음 13세에 불과한 삼근왕(477∼479)을 옹립하였다.

해구는 어린 삼근왕으로부터 일체의 군국정사를 위임받아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여 국정을 오로지 하였다. 이 때의 좌평 眞男과 덕솔 眞老와 같은 진씨세력이 중심이 되어 해구를 견제하고 나서자 형세가 불리해진 해구는 금강유역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의 하나인 燕氏세력과 손을 잡고 대두성을 거점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결국 덕솔 진로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관산성전투 – 성왕의 전사

[사료]

(554) 백제왕 명농(明穠)이 가야[加良]와 함께 와서 관산성(管山城)을 공격하였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飡)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金武力)이 주병(州兵)을 이끌고 나아가 서로 맞붙어 싸웠는데, 비장(裨將)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도도(都刀)가 갑자기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여러 군대들이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9,600명의 목을 베었고, 한 필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삼국사기 명농(明穠): 백제 제26대 성왕(聖王: 재위 523~554)의 이름이다

1 개요

관산성(管山城) 전투는 554년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규모 전투이다. 신라가 나제동맹을 파기하고 백제의 한강 유역 탈취로 인해 발생하였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을 분명히 하였고, 한반도 정세의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하였다.

2 백제의 한성 상실과 국가의 재건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은 475년(개로왕 21) 9월 고구려의 3만 병력에 포위되었다. 1년 전 백제 개로왕(蓋鹵王)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고구려군은 사방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을 하였고 바람을 이용해 성문에 불을 질렀다. 백제 사람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하였지만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던 중 개로왕이 기병 수십 기와 함께 도주를 시도하다가 붙잡혀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끌려가 살해당하였다.

개로왕의 아들, 혹은 동생으로 전하는 문주(文周)는 한성이 공격당하자 구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황급히 신라로 향했다. 하지만 그가 1만 명의 병사를 얻어 돌아왔을 때 한성은 이미 파괴되었고 고구려군은 물러간 뒤였다. 문주는 폐허가 된 도성 위에서 비통한 마음으로 왕위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에 해당하는 웅진(熊津)으로의 천도를 결정하였다.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군사적 측면이 가장 중요한 이유로 작용하였다. 웅진은 고구려와의 국경으로부터 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북쪽을 흐르는 금강과 주위를 둘러싼 산지 때문에 방어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그러나 웅진 시대의 백제는 한성 함락의 충격을 오래도록 떨쳐내지 못했다. 본거지를 잃고 쫓겨 내려온 왕에게 지방의 귀족 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는 권위와 힘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노골적으로 왕을 경시하는 신하들이 있어도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결국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병관좌평 해구(解仇)에게 목숨을 잃었다.

새로 왕위에 오른 삼근왕(三斤王)은 나이 13세에 불과하였다. 국정을 농단하던 해구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씨(眞氏) 가문의 힘을 빌어 진압하기는 하였으나 삼근왕 역시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삼근왕의 사인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의 이른 죽음 역시 의심스러운 면이 적지 않다. 삼근왕의 사후 왕위에 오른 동성왕(東城王)은 2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의 재건에 힘을 쏟았지만 신하인 백가(苩加)에게 살해당했다. 무령왕(武寧王)은 왕을 시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백가를 제압하는 한편 견실한 내정으로 나라의 체질을 튼튼히 다졌다. 또한 중국의 남조 국가인 양(梁)과 긴밀한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 교류를 활발하게 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양상은 중국식 무덤 양식을 채택한 무령왕릉과 그 안에서 나온 많은 중국계 부장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양은 백제가 다시금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에 남겼다.

3 한강 유역 탈환과 신라의 배신

523년(성왕 1)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이 사망한 후 그 아들인 성왕(聖王)이 왕위에 올랐다. 성왕은 부왕이 이룬 업적을 계승하는 한편 백제가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되찾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538년(성왕 16)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도 남부여(南夫餘)로 개칭하였다. 웅진으로의 천도가 한성 함락이라는 불의의 사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면, 넓은 평야 지대를 끼고 있으며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는 사비로의 천도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위한 것이었다. 성왕은 사비 천도 이후 착실히 체제 정비를 진행하는 한편 과거 백제의 중심지였던 한성과 한강 유역의 수복을 추진하였다.

551년(성왕 29) 백제는 신라와 연계하여 일시에 고구려의 남변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단행하여 한강 유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고구려는 국내 정세가 혼란한 상태였고, 서북쪽으로는 돌궐 세력이 군사적 위협을 가하고 있었던 터라 백제와 신라 양국의 연합 공격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개 지역, 신라는 상류의 10개 지역을 각각 차지하였다. 475년(개로왕 21) 한성을 잃은 이후 남쪽으로 쫓겨 와 오랜 기간 절치부심하였던 백제의 비원(悲願)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백제의 감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553년 신라가 돌연 백제가 확보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여 빼앗고 새롭게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그 배후에는 백제를 배제한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내란의 여파를 정리하고 서북쪽의 외침까지 대처해야 하는 상황에서 한시라도 빨리 남부 국경의 문제를 일단락하고 싶었다. 신라는 신라대로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고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한강 하류 지역을 손에 넣고 싶었다. 이에 함흥평야 지역과 한강 하류에 대한 신라의 권리를 인정해 주는 조건으로 양국이 은밀하게 동맹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4 관산성에서의 큰 싸움

힘들게 되찾은 옛 땅을 고스란히 다시 잃게 된 백제는 충격에 빠졌다. 배신감에 휩싸인 성왕은 그간 고구려를 향했던 창끝을 신라로 돌리고, 가야와 왜의 지원을 받아 신라에 대한 대규모 보복전을 시작하였다.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은 554년(성왕 32) 훗날의 위덕왕(威德王)이 되는 왕자 창(昌)의 지휘 하에 관산성(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을 공격하였다. 신라에서는 군주(軍主)인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伊湌)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백제군의 기세를 당할 수 없었다. 관산성 전투에 동원된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정확한 규모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 신라 측이 집계한 전과를 참고하였을 때 적어도 3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전투에 임한 백제 측의 분노와 결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 주는 숫자라 할 수 있다.

신라로서도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전쟁에서 패하면 힘들게 손에 넣은 한강 유역의 상실은 물론이고 나라의 명운마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이에 신라는 한강 유역에 새롭게 설치된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과 그가 이끄는 병력을 새로 전장에 투입하였다.

백제에 유리하게 진행되던 관산성 전투의 양상은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돌변하였다. 전쟁이 길어지자 성왕은 아들인 창을 위로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만을 이끌고 관산성으로 향하였는데, 백제군과 합류하기 전에 매복해 있던 신라군에 발각되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성왕을 죽여 공을 세운 이가 김무력의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의 고간(高干) 도도(都刀)라고 전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이와 관련해 보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성왕을 사로잡은 자는 신라의 좌지촌(佐知村) 출신의 말을 기르는 노비 고도(苦都)였다고 한다. 천한 신분의 고도는 사로잡힌 성왕에게 절을 한 후 머리를 벨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고, 성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에게 맡길 수는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고도가 재차 요구하자 결국은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였다고 한다.

성왕의 죽음이 알려지자 백제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진 반면 신라군의 사기는 크게 고양되었다. 기세를 탄 신라군은 전면적인 공세에 나섰고 백제군은 붕괴되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백제의 좌평(佐平) 4명을 비롯해 2만 9,700명에 달하는 적병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최전선에서 백제군을 지휘하던 왕자 창은 가까스로 신라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수 있었다. 백제로서는 뼈아픈 패배였다.

22담로

백제가 지방에 설치했던 행정 단위.

담로는 중국 역사서 『양서(梁書)』 「백제전」에 그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양서』에 의하면 백제는 전국에 22담로(二十二檐魯)를 설치하고, 그곳에 왕의 자제(子弟)와 종족(宗族)을 보내 다스리게 하였다고 한다. 담로를 왕족에게 나누어 준 봉지(封地)의 성격으로 이해하고, 백제에서 봉건제가 시행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담로에 파견된 왕족은 지방관의 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지방 제도의 일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 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은 즉위 초부터 왕족을 대외전쟁과 지방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 무령왕대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어 지방통치를 담당했는데, 담로의 책임자로 “자제종족(子弟宗族)” 즉, 왕족들을 파견한 것이다. 왕족의 지방 파견으로 지방 토착세력은 중앙의 통치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무령왕의 왕권은 한층 강화되었다.담로는 성왕(聖王, 재위 523~554) 대에 5방제가 시행되면서 그 명칭이 사라졌다.

성왕은 이전의 22담로제를 방군성체제(方郡城體制)로 대체했다. 방군성체제란 전국을 동·서·남·북·중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 그 아래에 다시 성(城)을 두는 체계이다. 총 5방 37군 200~250성이 있었는데, 방·군·성에는 각각 지방관이 파견되어 명령의 전달체계를 형성했다. 이렇게 지방까지 중앙의 통제력이 미침으로써 토착세력이 약화되고, 지방사회 역시 왕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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