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에 목숨 바친 조광조의 삶과 마주하다
시대를 초월해 현제적으로 요구되는 조광조의 개혁정신

【서울=코리아플러스】 김용상 기자 = 최근 대선을끝내고 정권교체를위해서 동분서주하고있는 정국에 지침서가 될만한 신간도서를  시간여행에서 발간 했다.

격동에시간을보내고있는개혁은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꼽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동안 개혁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냈던 적이 있었던가. 번번이 변죽만 요란하게 울리는 데 그쳤다. 개혁의 대상이었던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을 결국 극복해내지 못하고 중간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근현대 역사를 관통했던 시대정신인 민주화와 산업화과정을 거치면서 상식과 보편성 같은 가치는 되레 사치로 여기는 풍토가 만연해졌다. 그러다 보니 효율성과 속도만 치중했고, 그 결과 많은 적폐가 만들어졌다. 그 적폐는 이제 부메랑이 되어 성장과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적폐는 개혁의 대상이지 계승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조광조의 개혁 사상은 어떤 특정 지도자나 시대를 초월해 여전히 현재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다.

이 책은 ‘개혁’이라는 낱말과 떼래야 뗄 수 없는, 조선 중종 때 대사헌을 지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삶과 사상을 다룬다. 조광조는 ‘개혁’이란 화두가 필요한 시대의 격변기 때마다 소환되는 역사 인물이다.

특히 국정 과제의 일 순위로 으레 ‘개혁’을 꼽을 수밖에 없는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 단골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이전 정부와 차별화를 이루고 잘못된 적폐를 청산할 수 있는 개혁의 동력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조광조의 삶과 사상에 접근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특히 어린 시절의 경우처럼 사료의 절대 부족으로 실체적 사실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는 역사적 사실과 사실 사이의 빈 곳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팩션faction’ 형식을 빌려 조광조의 삶과 사상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 살가죽이 벗겨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조광조는 애초 벼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었었다. 무오사화로 함경도 희천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김굉필에게서 사사한 그는 고려의 정몽주와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던 도학道學의 계보를 이었다.

성균관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가게 되자 그는 공정하지 않다며 정식 등용문인 과거시험을 보았다. 알성시에서 을과 장원으로 급제하고 사간원 정언을 제수받은 그는 때마침 폐비 신 씨중종의 조강지처 복위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울 때, 언로를 막은 대간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사직을 배수진으로 치고 잘못된 조치에 강력하게 맞섰다. 결국, 대간들이 바뀌고, 구언에 응했던 박상과 김정은 유배에서 돌아와 복직되는 것으로 이 일은 마무리된다. 이렇게 조광조는 존재감을 분명하게 드러내며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후 유교 국가에서 도교를 섬기는 일은 안된다며 소격서 철폐를 추진했고, 개혁의 전위대로 삼을 사림 세력의 등용을 위한 현량과를 도입하는 한편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도록 하는 등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순풍에 돛단 듯 차근차근 개혁을 추진해 나가던 조광조는 마침내 아무도 달지 못했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나섰다.

그동안 수차례 논의는 있었지만 실제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정국공신 책봉 과정에서 있었던 문제를 정면으로 개정하기로 했던 것이다. 정국공신靖國功臣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는 공훈이었다. 그런데 이때 책봉된 117명의 공신 중 상당수가 아예 반정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책봉되었었다. 공적이 있으면 상을 받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반정 삼대장박원종·성희안·유순을 중심으로 한 권력자들의 가족 친지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책봉된다면, 이를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조광조는 거짓 공훈자들의 공신 책봉을 삭탈하기로 했었다. 물론 중종과 공훈자들이 속해 있는 훈구세력은 집요한 반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조광조는 거침없이 꿋꿋하게 삭탈 작업을 밀고 나가 결국 해내고 만다.

하지만 그 개혁의 칼날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을 겨눈다.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라는 중종의 밀지를 받은 훈구세력은 야밤에 신무문을 통해 궁에 들어가 이들을 잡아들이라는 중종의 교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조광조를 비롯한 개혁 세력들에게 붕당의 죄를 씌워 잡아들였던 이 사건을 역사는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부른다. 기묘사화로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한 달 만에 이런 절명시를 남기고 사사된다.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래 세상을 굽어보니, 충정을 밝게 비추리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그는 개혁하는 사람, 조광조이다.

학문에 뜻을 두었다가 관직을 추천받자 불공정하다며 정정당당하게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선 대쪽 선비, 허물 있는 아내를 내쫓기 전에 교화가 우선이라는 휴머니스트, 사간원의 일개 정언임에도 ‘직분’을 잃은 대간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사직 투쟁을 벌여 존재감을 드러낸 강직한 사람. 그는 진보적인 사람 조광조이다.

‘도를 밝히는 것[明道]’과 ‘혼자 있을 때를 조심하는 것[愼獨]’을 좌우명 삼아 일단 꺼냈다면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는 개혁을 위해 거침없이 내달렸던 사림의 영수, 백성들의 교화를 통해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백성들의 자치규약인 향약 보급에 나섰던 유학자, 서슬 퍼런 기득권층의 기세에 눌려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던 거짓 공훈을 삭탈했다가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행동하는 양심. 훗날 문묘에 종사 된 시대의 사표. 그는 개혁하는 사람 조광조이다

저자 조성일은 시골의 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천자문》을 배웠다. 사학과를 다녔으나 민주화 열기에 휩쓸려 역사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나마 역사 공부는 복학해서야 조금 할 수 있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 다니며 글을 써서 밥벌이를 했다. 대학 시절 은사님의 부탁을 뒤늦게 실천하는 마음으로 가문의 선조에 관한 이 책을 썼다. 지금은 역사와 관련한 책을 쓰고, 영어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인문학과 글쓰기 및 자서전 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중국 역사서 《자치통감》(전 32권) 한글 완역본 출간 작업에 참여해 번역원고를 원문과 대조하며 윤문했고, 《100년 후에 다시 읽는 독립선언서》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 역사》 《우리가 사랑했던 그리운 그 작가》 《그냥, 글쓰기》 《나의 인생 이야기 자서전 쓰기》 등의 책을 썼고, 《우주연대기》 《지금 당장 글 잘 쓰기》 《돈을 어떻게 벌어요?》 《전기: 나사렛 예수의 삶과 도덕》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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