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지난 정든세탁기, 부품이 없는 단종 제품이라고 합니다. 테두리 부분만 손질하면 잘 사용할 수 있는데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재사용되었으면 한다./Pixbay 

【대전 = 코리아플러스】 계석일 기자 = 훈장과도 같은 이마의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만 갈 때 나와 함께 수십 년 동거하며 지낸 가정 용품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30년 된 벽걸이 뻐꾸기시계는 회사 워크숍에서 노래자랑 1등 상으로 받은 것이고 빛바랜 20년 된 압력밥솥은 가족이 선물로 받은 것이고 김치 냉장고에 밀린 30년 된 항아리는 우리 가족의 세월이다. 어머니의 혼이 들어간 40년 된 재봉틀 과 어두침침한 아파트 귀퉁이에서 우리 가족들의 옷가지를 묵묵히 빨아준 15년 된 정 든 세탁기는 우리들에게 너무 고마운 물건들이었다.

저희 집에서 최소 15년 이상 저희들과 동거해야 하니 고장 나지 안아준 것만으로도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저희 사무실이 개업 할 때부터 지금까지 사무실을 지키는 25년 된 화분 2개가 있다. 한 개는 사철나무 하나는 난이다. 해외 출장 때 보름간 물을 주지 못했는데도 묵묵히 잘 살아주어 너무 고맙다. 요즘은 사무실에 수호신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사무실 그만둘 때 까지만 이라도 잘 살아주길 바라며 기도하고 있다.

부모님들이 사용하지 않는 오래된 가정용품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이유가 정이 들어가서 버릴 수 없다고 한다. 세상을 살다 보면 손과 마음과 눈이 머무는 곳에 정이 머물기 마련이다. 하루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가정용품을 지적한다면 당연히 세탁기를 든다. 요즘은 귀한 상품이라 여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전국노래자랑 장사씨름대회 최우수상품이 텔레비전 세탁기였다. 초등학교 다닐 시절에는 재산 목록 1호에 세탁기가 들어갔다.

저희와 함께 오랜 세월을 지낸 세탁기 고장이 났다. 오랫동안 고장 안 나고 잘 사용했는데 세탁물을 잘 못 넣었나? 왜 고장이 났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다. 삼성 서비스센터에 전화해서 모델명을 일러주니 15년 된 단 종 제품이라 수리 불가능 이라는 말을 전해 듣고는 한동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삶을 터전을 옮길 때마다 우리 곁을 지켜준 정 든 세탁기였는데, 입사시험 보러 갈 때도 회사 출근 할 때도 정결한 마음을 갖게 한 정든 세탁기였는데 이제 우리 곁을 떠나야 한다고 하니 너무도 아쉬워 고장 난 부분을 어루 만져본다. "더 쓸 수 있는데 왜 부품이 없는 거야? 부러진 플라스틱 부분만 교체하면 쓸 수 있는데" 혼자 궁시렁 궁시렁 중얼 거린다. 파손된 부분만 잘 수리돼서 세탁기 없는 나라에 전해주면 좋겠다.

이제 떠나야 하는 정든 세탁기, 버려지지 않고 수리되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는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다하는 정든 세탁기가 됐으면 한다. 어차피 만나면 헤어져야 하는 가정 용품들 드르륵 드르륵 하며 옷가지가 꿰매시던 어머니의 재봉질 모습이 그리워진다. 정든 세탁기야! 그동안 고마웠다. 그리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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