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효공왕 원년 897년에 최치원이 작성해 당나라에 보냈던 나라 문서에 신라를 가리켜 근화향 "무궁화 나라"로 적었다. 비록 나라 명칭이 시대에 따라 달라졌어도 무궁화는 삼국시대부터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명칭으로 쓰였다.

 

민족의 꽃/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홍천=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꽃이다. 특정 민족이 한 생물(꽃)과 5천 년 이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인류 역사상 우리 민족과 무궁화가 유일하다. 우리 민족과 무궁화의 인연은 우리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무궁화는 고조선 건국 이전인 신시 시대부터 우리 강역에 피어있었으며, 고조선 시대에는 제사를 지내는 신단 둘레에 무궁화를 심어 신성하게 여겼고, 무궁화는 우리 민족의 시원과 함께하며, 5천 년 넘게 우리 곁에서 함께한 민족의 꽃이다.

눈에 핀 꽃/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고려 시대 왕이 앉은 존귀한 자리에 무궁화가 피어있었고, 우리 민족에게 무궁화가 신성한 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무궁화는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에서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오고 있다.

아름다운 무궁화/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조선시대 당시에 무궁화는 임금이 과거 급제자에게 내린 꽃인 "어사화" 와 임금이 신하들에게 잔치에서 하사한 "진찬화"로 무궁화가 사용됐다. 왕실의 상징적인 이화가 있었지만, 우리 선조들은 주변에서 늘 볼 수 있는 무궁화를 더욱 친근하게 여겼다.

​현재 북녘의 꽃은 목련(함박꽃)이다. 또 연변 조선족자치주의 꽃은 진달래다. 민족은 하나인데 꽃이 세 개로 나 뉘어 있다. 무궁화는 5천 년 유구한 시간 속에서 국민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민족의 꽃으로, 자리매김하여 나라꽃이 되었다.

한서 남궁억 동상/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무궁화 꽃잎은 곁 보기에 다섯 장으로, 나눠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궁화는 꽃잎이 모두 하나로 붙어있는 통꽃이다. 지금은 비록 우리 강역과 나라꽃이 나눠져 있지만 우리는 본래 무궁화처럼 하나다.

무궁화가 우리 민족의 정신(얼)으로, 여겨지고,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무궁화를 우리의 표상으로 내세우자 일제는 무궁화를 "눈에 핀 꽃"이라 하며,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으나, 핍박을 받을수록 오히려 무궁화는 광복 구국의 희망으로 국민들 가슴에 피어났다.

3ㆍ1운동 기념비/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3ㆍ1 운동 기념비는 1919년  4월 1일 부터 11일까지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 되었다. 홍천읍에서는 서상우, 오창섭이 주동 되었고, 도로공사 부역군으로 가장한 북방농민 300여명이 합세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왜적의 총탄으로 많은 희생자의 숭고한 선열들의 뜻을 이어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한 탑이다.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앞장서 무궁화를 통해 민족혼과 독립의 희망을 고취하였으며. 수십 년 동안 해외에서 전쟁터를 누빈 독립군 등은 군가와 시가로 무궁화를 노래하며, 가족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면서 광복을 염원 하였다.

 

태양의 꽃/사진= 코리아플러스 라기영 기자

무궁화는 "태양의 꽃" 태양과 함께 꽃을 피우고 지며, 태양과 함께 새로운 꽃을 피운다. 무궁화는 태양과 같이 밝은꽃 이란 의미에서 "환화" 로 불리는 꽃 모양새나 상징적 의미를 살펴볼때 에너지가 무궁한 태양의 꽃 으로서 우리 민족에게 하늘의 꽃으로 신성시 된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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