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敞吳氏의淵源 및 고창 유허비

고창오씨시조 유허비 고창 체육공원 안치

【서울=코리아플러스방송】 오공임 기자 = 1.高敞吳氏의淵源

고창오씨(高敞吳氏)의 비조(鼻祖)에 관해서는 悠久한 옛일로 高麗時代, 문헌(文獻)에 先祖들을 복양인(濮陽人) 또는 신라왕(新羅王)의 외손(外孫)등으로 記錄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元來 古朝鮮 領土였던 복양(濮陽)에서 新羅에 移住하여 상당한 職位에 있었던 것으로 유추되나 상고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고려 10대 정종조(靖宗朝)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 또한 사목(司牧)으로 큰공을 세워 고창(高敞)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은 오학린(吳學麟)을 고창오씨(高敞吳氏)의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오학린(吳學麟)은 1009년에 出生하여 文憲公 崔冲 先生의 文憲公徒로 지공거전시(知貢擧典試)에 及第하여 당시 學者들이 가장 선망(羨望)하던 청요직(淸要職)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등용되어 그重責을 다했을 뿐아니라. 거기에 더해 당시 北方國境인 鴨綠江 일대에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스러울때 그곳 司牧으로 拔擢되어 그地方을 平定하고 民心과 백성들의 生業을 安定시키는 큰 功을세워, 高敞을 食邑으로 下賜받으면서, 官員이나 土豪들을 包容하는 本貫制와 土姓 粉定制度에 依하여 本貫이 高敞으로 定해젔다.

始祖 오학린(吳學麟)은 文敎 振興에 全力하였으며,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한 많은 시(詩)와 著述이 있었다고 東人文集 三韓龜鑑등에 記錄이 傳해지나 散逸되고, 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再乞推毁鴨江城弓口狀), 중유흥복사시(重遊興福寺詩), 상비묘시(湘妃廟試)등이 補閑集,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등에 記錄되어 傳해저서 그文章이 문아(文雅)함을 였볼수있다.

2世 오질(吳質)도 직한림(直翰林)이였고, 3世는 3兄弟로 모두가 著名한 學者였다.

兄 吳世功은 고려 17대 毅宗朝때 청주목장서기(淸州牧掌書記)와 19대 明宗朝에 慶尙道 안찰사(按察使)를 歷任하였고 둘째 오세문(吳世文: 號 濮陽)은 1152年 승보시(陞補試)에 등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 동각학사(東閣學士) 등을 歷任하였으며, 歌辭文學의 嚆矢인 歷代歌와 潮水論, 군충시(羣蟲試). 삼백운시(三百韻詩).등의 著書가 있다고 傳해진다.

셋째 오세제(吳世才 謚號 玄靜)는 뛰어난 문장가(文章家)이며 시인(詩人)으로 千餘年이 지난 지금도 그의 청아(淸雅)한 漢詩는 高等學校 敎科書에 登載되었으며, 慶州의 皇城公園, 高敞의 文學碑公園에 詩碑가 세워저있다.

高麗의 석학(碩學) 문순공(文順公) 이규보(李圭報)는 그의 三百韻詩에 “公의 祖父와 아버지 모두가 及第하여 代代로 이름높은 家門이다.

(公祖及考皆登第爲世名儒)라고 동각학사 오세문(東閣學士 吳世文)을 칭송(稱誦)하였고, 서하임춘(西河林椿)선생은 서하집(西河集)에 그의 아우 세재(世才 謚號 玄靜)를 칭송 “명성은 동국에 짝할 사람이 없고 집안은 대대로 중앙의 名門이다. (聲名東漢無雙客 家世中朝第一流)”라고 적었으며, 또 東國餘地勝覽 高麗人物編에는 吳學麟은 科擧에 及第하여 翰林學士가 되었고 孫子 셋은 모두가 學者로서 名聲이높다.

(高麗人物 吳學麟 登進士第官 至翰林學士 有孫三人曰 世文, 世功, 世才 皆以 文學知名)라고 記錄된 名門이다.

<參考文獻: 韓國氏族總攬. 牟陽實錄. 高敞吳氏世譜>

竹林祠

始祖 翰林太學士 吳學麟公.濮陽世文公 .玄靜世才公.三位를 配享 所在地: 黃海道 坪山郡 龍山面 坪村里

우리나라 吳氏는 무혜공. 오첨(武惠公,吳瞻)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齊나라 수군도독이였으나,신라지증왕 원년(500년)에 함양에 김종지의딸(金宗之女)과 결혼 그손이 번창하여 여러관향(貫鄕)의 吳氏로 갈렸으므로 우리나라 모든 吳氏의 鼻祖이다. 우리 高敞吳氏.始祖(고창오씨.시조) 吳學麟은 鼻祖 吳瞻의 17세손이며 신라왕의 부마 오적길(吳迪吉)의 玄孫이다.

오첨(吳瞻)의 시호 무혜공(諡號 武惠公)은 高麗太祖가 추증한 것이다.

吳學鱗은 1009년에 출생하여 문현공(文憲公) 최충( 崔冲)선생의 文憲公徒로 知貢擧典試에 及第하여

당시 학자들이 가장 선망하던 淸要職인 翰林學士에 등용되어 그중책을 다하였을뿐 아니라. 거기에 더해 북방 국경인 鴨綠江일대에 거란족의 침노가 심해 소란스러울때 그곳 牧民官으로 발탁되어 그지방을 평정하고 民心과 生業을 安定시키는 큰공을 세워, 高敞을 食邑으로 下賜받으면서 官憲이나 土豪들을 포용하는 本貫制와 土姓分定制度에 의하여 本貫이 高敞으로 정해젔다.

始祖 吳學鱗은 문교진흥에 진력하였으며 문장이 典雅한 많은 詩와 著述이 있었다고 東人文集 三韓龜鑑 등에 기록이 전해지나 散逸되고, 乞推毁鴨江城弓口狀(걸추훼압강성궁구장). 再乞推毁鴨江城弓口狀(재걸추훼압강성궁구장). 重悠興福寺詩(중유흥복사시). 湘妃廟詩(상비묘시) 등이 보한집.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전해져서 그문장이 文雅함을 엿볼수있다.

2세 吳 質도 直翰林이였고 ,3세는 3형제로 모두가 저명한 학자였다.

兄 吳世功은 고려 17대 毅宗朝때 淸州牧場書記 와 19대 명종조에 경상도 按察使를 역임하였고, 둘쩨 오세문(吳世文 號澓陽)은 1152년 陞補試에 등재하여 翰林學士,東閣學士 등을 역임하였으며,가사문학의 효시인 歷代歌와 潮水論, 羣蟲詩, 三百韻詩등의 저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셋쩨 吳世才(謚號 玄靜)는 뛰어난 문장가이며 시인으로 천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淸雅한 漢詩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등제됬으며, 경주의 凰城公園. 고창의 文學碑公園에 詩碑가 세워져있다.

고려의 碩學 文順公 이규보는 그의 三百韻詩에 공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가 급제하여 대대로 이름높은 가문이다.(公祖及 考皆登第爲世名儒)라고 동각학사 오세문을 칭송하였고 西河 林椿 先生은 西河集에 그의 아우 世才(謚號 玄靜)를 칭송<명성은 동국에 짝할사람이 없고 집안은 대대로 중앙의 명문이다 (聲名東漢無雙客 家世中朝第一)>라고 적었으며, 또 동국여지승람 고려인물편에는 <오학린은 과거에 급제하여 翰林學士가 되었고 손자 셋은 모두가 학자로서 명성이 높다(高麗人物 吳學鱗 登進士 第官至翰林學士 有孫三人 曰 世文世才皆以 文學知名) 라고 기록된 名門이다.

 

현 고창오씨 대종회장은 오윤필 회장 역임 

고창 유허비 中 오윤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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