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돈여자고등학교의 역사

“호수돈은 나의 고향이며 어머니며 종교다”

- <호수돈의 추억>에서 동문의 회고-

초창기 Beeginning period (1899~1910)

사진= 배목골 두을라학당(1899년) 초창

1899년 9월 선교활동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캐롤 여사가 개성에 부임해 당시 인삼저장고였던 쌍소나무집이라는 초가를 사들여 매일학교(DAYSCHOOL)를 운영한 것이 호수돈의 첫 시작이다.

특히 한국의 여성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던 캐롤 여사는 함께 부임한 크램부인과 와그너의 도움으로 ‘개성여학당’ 이라는 이름의 교육기관을 설립한다.

“아무쪼록 학문을 높이 배워 사나이들보다 행실도 더 높고 지식도 더 넓혀 부인의 권리를 찾아라” -독립신문의 기고문 중에서-

호수돈이 미션계 학교로 그 기틀을 마련한 무렵인 1910년 전후의 한국 사회는 교육열이 상당했는데,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학에 대한 열정과 외국 선교사들에 의한 미션 계통의 노력, 여성들의 향학열이 함께 어우러져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됐다.

이 시기에 개성여학당은 여성과 신교육을 수행하는 전문여성교육기관의 모태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지난 1906년 보통 학교령이 발표되면서 개성여학당의 학칙이 정해지고 성장의 기틀이 마련된다.

1908년에는 사립학교를 탄압하는 사립학교령 칙령이 시행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정신의 고취와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서 교육이 더욱 강화된다.

사진=호수돈여숙 교정(1920년대)_아울러 같은 해 앞에

아울러 같은 해 고등여학교령이 반포돼 '홀스톤'의 한자음을 가차한 호수돈여학교라는 교명으로 본격적인 상급학교 교육을 시작해, 지난 1909년 5월 3년제 고등과의 인가를 받아 5월 15일을 개교기념일로 정하고 이듬해 호수돈여숙으로 개칭한다.

-3.1운동과 호수돈 비밀결사대

사진=3.1운동과 호수돈 비밀결사대 학교전경
사진=3.1운동과 호수돈 비밀결사대

민족대표 33인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1일의 거사가 비밀리에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호수돈여숙의 학생들은 권애라, 장정심, 조숙경이 핵심 멤버로, 이향화, 권명범, 이영지, 류정희, 조화벽, 김정숙 등이 주도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교내 구본관 4층 기도실에서 밀회를 가졌고 거사준비를 시작했다.

이들은 기숙생 80여 명을 포섭해 연명 선서를 만들었으며, 극비리에 커튼으로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윽고 3월 3일. 호수돈 비밀결사대 학생들은 아침기도회를 마친 뒤 자퇴서를 쓰고 세 대열로 나뉘어 찬송가를 부르며 현병경찰서 앞으로 나아가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다.

조선총독부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만세운동을 저지하고자 휴교령을 내렸고 학생들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항일운동, 구국운동을 펼치며 3.1만세운동이 민중운동으로 봉기시키는 데 앞장섰다.

특히 ‘호수돈 비밀결사대’의 일원인 조화벽은 목숨을 걸고 버선 속에 독립선언서를 숨겨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 양양으로 가져가 양양 만세운동의 불씨를 지폈는데, 이것은 우리 호수돈의 후배들에게 자긍심을 갖게 하는 사건이다.

수난기 Time of suffering (1911~1953)

"여느 여학교와 비할 데 없이 조선의 딸로 길러주는 학교"

-도산 안창호, 호수돈 방문 중에-

한일합방, 6.25전쟁이라는 역사적인 시련 속에서도 호수돈 교육의 내실이 다져진 시기이다. 전국적으로 한민족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는 속에 호수돈의 여학우들은 3.1운동, 6.10만세 운동 등에 동참하며 주체적인 여성, 민족애가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어린이를 위한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교육은 어리면 어릴수록 그 중요성이 더 크다”라는 이념 아래 개성에서는 처음으로 유치원을 병설한다.

1918년에는 실업부인 기예과가 신설되고, 교가가 처음으로 울리기 시작하면서 1922년 호수돈의 재학생 수는 600명에 달한다. 학교 규모 또한 4층의 석조건물로 가정과 실습실, 도서실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개인 음악 연습실이 18실이나 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괄목할만한 학교 규모이다.

하지만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이 극에 달하면서 신사참배까지 강요당하게 된다.

이를 거부한 학교는 폐교 처분됐으며 결국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철수한다.

선교사들의 철수로 학교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갈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황면규, 진홍섭 등의 독지가를 만나 1941년 강기순 교장 재직 당시 재단법인 명덕학원을 설립해 호수돈을 영원한 반석 위에 울리는 초석이 된다.

또한 강기순 교장은 한국전쟁으로부터 학교를 보호하고자 남하해 대전에 호수돈을 재건한다.

이후 호수돈은 참된 교육과 가리는 실현하는 ‘민주교육’의 행보를 시작한다.

중흥기 Turning point (1953~1971)

한국전쟁으로 남하한 호수돈이 본격적으로 대전 시대를 열며 전환기를 맞이한다. 대전에서 시작된 제 2의 호수돈은 대전 제일감리교회 옆의 기와집 교사에서 시작한다. 당시 고등공민학교가 폐교되면서 학교를 떠나야했던 여학생들이 ‘호수돈’으로 옮겨 학업을 이어갈 수 있게 된다.

1953년 4월 20일 재단법인 명덕학원의 호수돈이 개교하면서 ‘호수돈’이라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자랑스런 이름 아래 대전에서 그 아름다운 첫 종소리를 울린다. 비록 임시교사였지만 어려운 교육 여건 속에서도 무용, 음악, 연극, 배구, 탁구, 육상, 합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걸쳐 1인 1기 교육에 힘쓴다.

아울러 학생들의 기량을 키우기 위해 교비 응변대회를 개최하고 문예지 「호종」을 발간하는 등 호수돈의 내적 성숙이 급성장하게 된다. 1957년 개교 53주년 기념일에 맞춰 신축교사가 완공되면서 보다 안정된 교육 환경을 갖추게 되고, 이후 기숙사를 건립해 교육의 내실을 굳건히 하기에 이른다. 초기 기숙사에는 50명의 학생이 머물렀으며 대전에서는 유일한 학생복지시설로 운영되었다.

발전기 Time of development (1972~ )

사진= 발전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당시 모든 사학들이 재정이 어려워져 다투어 학급 수를 늘려갈 때 호수돈만은 예외로 질을 중요시하는 교육을 강조한다. 학급편성의 다양화로, 학생들의 능력과 적성에 따라 특수, 인문, 자연, 예능, 직업 등 5개 반으로 편성해서 보다 전문화된 교육을 실시한다. 이는 학생과 교직원 사이는 물론 학생 상호 간에 가족적인 단단한 보금자리를 이루게 하교 여성교육에 전념하여 명문 호수돈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계기가 된다.

나아가 1972년 5월 3일 당시 이사장인 문태임 동문과 손병민 교장의 노력으로 현대식 건물인 현(現) 고등학교 교사를 준공한다. 이어 1974년에는 테니스장을, 1979년에는 개교 80주년을 맞이하며 가정관을 증축하고 1967년에는 호수돈 역사관을, 1999년에는 개교 100주년이라는 영예로운 한국사학의 역사를 기록한다.

교육여건이 안정화되면서 호수돈은 교육 성과면에 있어서도 급성장하게 된다.

사진=학교전경

2000년대에 들어서 학력신장 우수학교 선정 및 학교평가 최우수학교로 선정(2011)되고, 학업성취평가 우수 100대 고교 선정(2012), 학력 신장 최우수학교 선정(2013) 등 명문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다. 2014년 호수돈은 학년별 드림 디자인 프로젝트, 최첨단 교과교실제, 체계적인 독서‧토론‧논술 프로그램, 국제교류, 감성교육 등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학생들이 보다 창조적이고 슬기로우며 품위 있는 여성으로 거듭나도록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의 미래를 선도할 여성 교육의 요람 호수들은 오늘도 뿌리 깊은 명문사학으로서의 모범이 되고 있다.

- 장수진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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