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도시조(入道始祖) 오석현(吳碩賢)

제주 군위오씨 입도 시조님 산소 참배 사진 오공임 기자
군위오씨 입도시조 영성 사진 오공임 기자
제주 군위오씨시조님 묘소 전경 사진 오공임 기자 

【서울=코리아플러스방송】 오공임 기자 = 득관조(得貫祖) 오숙귀(吳淑貴)

입도시조(入道始祖) 오석현(吳碩賢)

1. 입도(入道) 배경

군위(軍威)오씨 시조는 고려조에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지낸 오숙귀(吳淑貴)공으로 제주도의 입도조(入道祖)인 석현공(碩賢公)은 오숙귀(吳淑貴)公의 9대손이 된다. 석현공(碩賢公)의 선친은 경북 군위군에서 진무사(鎭撫使)를 지낸 진인공(進仁公)이다.

공은 1420년에 진인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20세되던 해(세종 22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36세에 나주 영장(通政大夫行羅州營將, 正三品)에 이르러 문무와 지덕을 겸비한 관료로 호평을 받고 있었다.

1453년 계유정난에 이어 1455년 단종 3년 숙부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단종이 폐위된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서인(庶人)의 신분으로서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선왕 문조의 유명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고위관료 충신들이 무참하게 처형당하게 된다.

정변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던 나주영장 석현公은 충의가 짓밟히는 서글픈 고통을 몸소 겪으면서 미련없이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제주에 낙향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일신은 물론 가문의 장래를 결정짓는데 얼마나 고뇌에 찬 심사숙고를 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 제주도에서의 석현공

공(公)은 1456년 가족과 함께 제주 성산포구로 입도하여 현재 성산읍 신양리인(정의현 가둔리(嘉遯里))에 정착하였다. 이곳이서 인지(人智)를 펴고 향민을 훈학계도하며 이 고장에 뿌리를 내렸다.

이후 2대 철순(哲舜), 3대 세춘(世春), 4대 윤걸(允傑)까지 성산 일대를 중심으로 생활하다가 입도 5세조에 와서 4형제 손(孫)으로 분파되어 현재 장파, 중파, 중말파, 말파로 호칭하여 제주도 전역에 걸쳐 거주하고 있다.

선조들의 구전에 의하면 입도조(入道祖)께서 후손들에게 학문을 탐구하여 진사(進士)는 하되 높은 벼슬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후손들이 정치적 휘말림이 없도록 유시하였던 것이었다. 이 부분이 묘의 위치를 선택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제주도내에서 석현 공에 대한 특별히 전해지는 기록이나 설화는 없다.

아마도 정변에 따른 세조 찬탈에 회의를 느껴 입도한 처지이기 때문에 고서에 대한 기록이 많이 사장되었을지도 모르겠다.(문헌 참조)

▷ 군위오씨 광산김씨 할머니와 제주도 입성 오늘에 이르러 시조님 묘소 전망은 일출성산이 병풍처럼 드리워져 뛰어난 명당의 터전으로 수려한경관을 보게된다. 그 후손들의 명성이 자자하다.

현재 제주 지사 오영훈 역임으로 가문을 빛내준 인물이며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뤄낸 여러 분이 계신다.

오남열 총재님 인솔에 의해 제주 군위오씨 시조님 묘소에 참배드릴 기회는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동복오씨와 형제지간으로서 그 우의 또한 각별하다,

역대 대종회장 훌륭한 인물이며 현재 오종훈(吳宗勳)대종회장 임기중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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