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코리아프러스] 장영래 기자 = 문화재청(청장 변영섭)은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등 4건의 유적·유물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九里 太祖 健元陵 神道碑)’는 조선왕릉 내 총 3기의 왕 신도비 중 첫 번째 비로, 1409년(태종 9)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 등을 기리고자 일대기를 지어 돌에 새긴 것이다. 이수(螭首), 비신(碑身)과 귀부(龜趺)가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의 신도비는 물론 여타 신도비의 전형이자 기준작으로 평가된다.

비문은 권근(權近, 1352~1409), 비음기(碑陰記, 비석 뒷면에 새긴 글)는 변계량(卞季良, 1369~1430)이 지었고,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은 정구(鄭矩, 1350~1418), 비문 글씨는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이 썼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는 조선왕릉 내 총 3기의 왕 신도비 중 두 번째 비로, 1422년(세종 4)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태조의 다섯 째 아들로 조선왕조 국기를 튼튼히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이 지었고, 전액(篆額)은 권홍(權弘, 1360~1446)이 썼다. 비문 글씨를 누가 썼는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의 서예문화와 경향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의 귀부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손상되었지만, 이수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명나라 석비 조각양식을 받아들여 조선 초기의 새로운 석비 전통을 마련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서울 세종 영릉 신도비(서울 世宗 英陵 神道碑)’는 조선왕릉 내 총 3기의 왕신도비 중 세 번째 비로, 1452년(문종 2)에 세운 것이다. 이 신도비는 제4대 임금 세종(世宗, 1397~1450)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일대기를 담아 세운 비이다. 비문은 정인지(鄭麟趾, 1396~1478)가 짓고, 안평대군 이용(李瑢, 1418~1453)이 썼다. 비록 비신의 표면이 심하게 부식(腐蝕)되고 박락(剝落)되어 비문 내용을 알아볼 수 없으나 “···겸 성균관대사성 신 정인(兼 成均館大司成 臣 鄭麟)···”과 같은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고, 비신과 한 돌로 제작된 이수가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어 태조, 태종의 신도비와 함께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비로 평가된다.

‘합천 해인사 관음암 내전수함음소(陜川 海印寺 觀音庵 內典隨函音疏)’는 1245년(고려 고종 32)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하여 완성한 경판이다. 내전(內典)은 부처의 설법을 담은 불경이고 음소(音䟽)는 음에 대한 해석을 뜻하는 것으로, 내용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여섯 가지 실천덕목인 육바라밀다(六波羅蜜多)를 설명한 것에 대한 주석이다. 본문은 반야(般若)가 한역한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大乘理趣六波羅蜜多經)의 10권에 대한 음의(音義)가 수록됐고 권말에는 ’을사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의 간기가 있다. 재조대장경의 간인본에는 남아 있으나 대장목록에는 없으므로 대장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문화재 4건에 대하여 30일간의 지정 예고 기간 중 수렴된 각계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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