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애리시'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들의 선택은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자신의 운명은 물론 인류와 한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는 위대한 선택이 되기도 했다

【공주=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5월 6일 서울 용산구 문체부 스마트워크센터 회의실에서 고 사애리시 선교사의 국민훈장 동백장을 '이야기 사애리시'의 저자인 임연철 씨에게 수여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 1915년 충남 공주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단체 사진의 연구원 측은 앞에서 세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소녀가 유관순 열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사애리시 선교사. / 장영래 기자
100년 전 선교사가 수업을 하고있다. 
100년 전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 모습.
100년 전 공주영명중고등학교 모습이다. / 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현 영명중학교. / 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공주=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박양우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 5월 6일 서울 용산구 문체부 스마트워크센터 회의실에서 고 사애리시 선교사의 국민훈장 동백장을 '이야기 사애리시'의 저자인 임연철 씨에게 수여했다.

임연철 교수는 이야기 사애리시 ‘유관순 열사 신앙의 어머니, 충청 선교의 개척자’를 지은 저자다.

사 여사는 1900년부터 40년간 충남 지역에서 감리교 선교사로 일하며 공주 영명학교를 비롯해 여학교설립했고 수많은 교회의 설립을 도왔다.

유관순 열사에게 영명학교와 이화학당 입학을 주선하며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사태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 여사의 후손들이 입국하지 못해 훈장은 전기 '이야기 사애리시' 저자 임연철 씨가 대신 받았다.

사애리시 기념사업회(이사장 이기복 목사·회장 유영완 목사)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된 뒤 후손을 초청해 서훈기념식을 갖고 훈장을 전달할 계획이다.

임연철 미국 드루대 감리교 아카이브 연구원·이야기 사애리시 ‘유관순 열사 신앙의 어머니, 충청 선교의 개척자’ 지은이를 충남 천안시 하늘중앙교회 내 '앨리스 샤프 기념 홀' 카페에서 만나 유관순 열사를 키운 사애리시와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 등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 사애리시’(신앙과지성사)를 쓴 임연철 박사는 올해가 유관순 열사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들의 선택은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임연철 박사는 순국 100주기를 맞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도 남들이 가지 않는 덜 밟은 길을 택했다고 덧붙였다.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들의 선택은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임연철 박사는 순국 100주기를 맞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도 남들이 가지 않는 덜 밟은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문명의 선구자들의 선택은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임연철 박사는 “순국 100주기를 맞는 유관순 열사와 함께 20세기 초 한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들도 남들이 가지 않는 덜 밟은 길을 택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는 “자신의 운명은 물론 인류와 한 국민의 운명을 바꿔 놓는 위대한 선택이 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제 친할머니 강계순 권사를 논산제일감리교회로 전도해 우리 집안에 복음을 선물하셨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부인은 충남 지역 어르신들에게 아름다운 추억을 선물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논산 가야곡을 방문하다 다리가 부러진 이야기도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 했다.

그는 미국 드루대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사부인과 관련한 사료를 수집해 집필한 전기를 드루대 지원으로 출간했다.

그는 “신앙의 후배들이 선한 삶을 살았던 선배를 기억해야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 유관순 열사를 키운 사애리시와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그녀의 온전한 몸에다 수의를 입혀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의 이야기를 저서로 출판할 계획“을 밝혔다.

데이비드(64)·스티븐(62) 솔로즈 형제는 '충남 믿음의 어머니'로 불리는 앨리스 샤프(1871~1972) 선교사의 후손. 샤프 선교사 언니의 증손자인 이들은 하늘중앙교회(유영완 담임목사)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게했다고 밝히면서 유품과 기념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4월 예정이었던 유관순 열사 사진전이 코로나 19 사태로 오는 6월에 충남역사문화원에서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러한 그의 열정으로 이번 전시회가 열린 것이다.

그는 특히 비슷한 시기 사애리시 선교사는 영명학교 학생이던 조병옥을 연희전문학교로 유학 보내 지도자 훈련을 시켰다. 여학생뿐 아니라 남학생들도 후원했다.

이와 관련해 서애리시 선교사와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 선교사가 조병옥 학생과 유학생 일 때의 관계를 밝혔다.

조병옥이 배재학당 학생일 때 서재필에게 배재학당에 강사로 나가 청년들을 교육하면서 1896년 11월 교내에 협성회(協成會)라는 학생토론회를 조직했다.

협성회는 서울의 청년학생들을 교육, 계몽하고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에 영어선생으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 선교사가 조병옥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지네트 월터(1885-1977) 이화학당 5대 학당장이 미국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 막바지에 쓴 유석 조병옥(1894∼1960)박사의 영문편지 전문이 자서전에 수록돼 있었다.

이 편지를 자신의 자서전에 게재한 지네트 월터는 3ㆍ1운동 후 잠시 학당장을 하다가 앨리스 아펜젤러(감리교 첫 선교사 아펜젤러의 딸)에게 학당장을 물려주고 안식년 휴가를 받아 1923년과 1924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에서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조병옥도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25년 귀국했다.

조병옥은 지네트 월터를 고귀한 분(noble soul)으로 표현하며 젊음을 희생하고 가족을 뒤로한 채, 개인의 야망과 명예도 버린 채 먼 나라 한국에서 생소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봉사의 삶을 살아오고 있다고 찬사를 올렸다.

유학생들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먼저 하자는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학생들에 대해 ‘돈과 명예만 관심 갖는다’는 여론의 비판에 대해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극단적으로 되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그 같은 비난을 피하고 우리 자신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도록 만드는 데 ‘헌신(devotion), 봉사(sevice), 희생(sacrifice)의 삶을 사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병옥은 “누가 명예와 부를 싫어하겠느냐?”며 “두 가지는 인간을 행동하도록 하는 필요한 동기이지만 우리의 이상적인 삶을 대치하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31세의 젊은이가 갖고 있었던 가치관이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가치관에 따라 1929년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배후 조종 혐의로 3년 형을 선고받았고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또 2년을 복역했다.

지네트 월터는 100년 전 조병옥이 동료 후배 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자리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조병옥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조병옥으로부터 헌사의 편지를 받은 지네트 월터는 1911년 내한해 1926년까지 이화학당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후 가정 사정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귀국 후에도 그녀는 캔자스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가정방문교사로 일하며 주로 문제학생과 불우한 가정환경의 학생을 돌보고 선도하는 업무를 1954년 은퇴할 때까지 계속하다 1977년에 생을 마쳤다.

서재필은 신문논설과 강연 및 강의를 통해 우리 민족에게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리는 한편, 민족독립 사상을 고취시키고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이것은 한국인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당시 29세였던 사애리시(史愛理施·앨리스 샤프·1871~1972) 선교사였다.

캐나다 출신인 그는 한국에서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한 뒤 충남 공주에 선교기지를 세웠다. 부부는 교육 선교와 여성 지도력 양성에 방점을 찍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06년 선교 활동 중 병에 걸린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사역을 계속하다 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의 은퇴선교사요양원에서 지내다 72년 9월 8일 10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는 한국에서 사역하며 공주영명중·고등학교 전신인 명설학교를 비롯해 9개의 여학교와 7개의 유치원을 설립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목사인 전밀라와 여성 경찰서장 노마리아가 사애리시 선교사의 제자였다.

1919년 3·1운동의 상징인 유관순 열사에게 독립의식을 심어준 것도 그였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1910년 충남 천안 병천면 지령리교회에서 여덟 살이던 유 열사를 만났다.

그는 나이가 어렸지만, 신앙심이 깊고 영리했던 유 열사를 눈여겨보다 수양딸로 삼았다. 1916년에는 유 열사를 서울 이화학당에 편입시켰다. 여성 지도자로 키우려는 취지에서였다.

비슷한 시기 사애리시 선교사는 영명학교 학생이던 조병옥을 연희전문학교로 유학 보내 지도자 훈련을 시켰다. 여학생뿐 아니라 남학생들도 후원했다.

​그는 앨리스 샤프라는 본명보다 한국명 사애리시로 널리 불렸다. 그만큼 허물없이 한국인들과 어울리며 가까이 지냈다. 지역 주민들은 그를 ‘사부인’으로 부르며 의지했다.

하늘중앙교회가 사애리시 선교사 현양에 나선 것은 이 교회 역시 사 부인과의 인연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1905년 사 부인이 전도한 당시 65세 유씨 할머니 댁에서 예배를 드린 가정 교회가 이 교회의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1922년 천안 최초로 이 교회에 유치원을 세운 것도 사 부인이었다.

유영완 목사는 "사 부인은 1939년 은퇴해 미국으로 돌아간 후로 연락이 끊겨 자료가 태부족한 상태여서 기념사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임연철 박사가 미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열정적으로 자료를 수집하면서 베일에 싸였던 사 부인의 생애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 부인의 고향에서 후손들을 만난 것도 임 박사였다.

소식을 들은 하늘중앙교회는 올 초 완공된 교육관에 앨리스 샤프 기념홀을 개관했다.

임 박사의 저서 '이야기 사애리시'(신앙과지성사) 출판기념회와 사진 전시회를 개막했다.

이 자리에선 후손들이 보관해온 사 부인의 유품 기증식도 열렸다.

후손들이 가져온 유품들은 80년 전 소박한 신앙생활을 보여준다.

한복을 입은 작은 인형, 색색 골무, 만년필 한 자루, '만세(萬歲)' 글자가 수놓인 복주머니 등이다.

사 부인이 마지막까지 걸고 있었다는 목걸이는 작은 십자가와 '수(壽)'자로 이뤄졌다.

십자가엔 '보령교회 리신덕' '사랑'이란 글자가 새겨졌다. 선교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는 사 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었다.

유 목사는 "앞으로 관련 자료를 더 모아 작은 기념관도 만들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사애리시가 만든 여학교는 명선여학교, 영명여학교, 영화여학교(논산), 경천여학교(공주 계룡면), 만동여학교(논산 강경), 둔포여학교(천안), 양대여학교(천안), 입장여학교, 공주실업학교, 갈산여학교, 청양여학교, 군말여학교, 영명고등학교 등이다.

【3․1절에 동상으로 살아난 사애리시(史愛理施)】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 1915년 충남 공주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단체 사진의 연구원 측은 앞에서 세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소녀가 유관순 열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사애리시 선교사.
공주영명고등학교 교정에 서 있는 사애리시와 유관순 여사

본명은 앨리스 해몬드(Alice Hammond).

1871년 캐나다 동쪽 끝 노바스코시아에서 태어났다. 1990년 말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처음 왔다. 뒤따라온 뉴욕 선교훈련원 동창 로버트 샤프(Robert Sharp)와 1903년 이화학당 본관에서 결혼, 이름이 앨리스 H. 샤프로 바뀌었다. 남편 로버트는 충남지역 선교 중 발진티프스에 전염돼 1906년 순직했으나 그 녀는 1939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39년을 공주를 중심으로 충남 지방에서 살았다. 그 사이 성(姓) 샤프는 사(史)씨가 됐고 이름 앨리스는 애리시(愛理施)가 됐다. 청상과부가 된 그녀를 당시 사람들은 ‘사 부인’으로 불렀다.

1900년 대 초반 충남에서 살았던 한 여선교사를 소개하는 이유는 그녀가 거주했던 공주 선교사 고가(古家) 옆에 뜻 깊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기념 동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남편 로버트, 유관순 열사의 동상과 함께⋯.

지방에서 활동했던 탓에 사부인은 동시대 이화학당을 세운 스크랜튼 부인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유관순 열사의 전기에도 나올 만큼 개화기 한국 여성 교육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사부인이 없었다면 유관순 열사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고 질문해야 할 만큼 짧은 유관순 열사의 생애에서 사부인은 중요한 존재였다.

1902년 12월 유관순 열사가 태어날 때 현재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의 당시 지명은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였다. 이미 이곳에는 1898년 유 열사의 친척 어른이었던 유빈기(柳斌基)가 세운 기도처가 있었고 발전해 교회가 되자 교회 마당은 어린 유관순 열사의 놀이터였고 배움터였다.

1904년부터 공주를 중심으로 선교와 여성교육에 발 벗고 나선 사부인이 선교 차 들른 지령리 교회(현 매봉교회)에서 어린 유관순을 만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당시 선교사 보고서에도 ‘치릉이(chi-reung-i)'교회로 표기된 ’지령리 교회‘의 상황이 기록돼 있다. 여러 차례 지령리 교회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어린 유관순이 똑똑하고 신앙심이 있는 것을 확인한 사부인은 자신이 세운 공주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켜 2년을 가르친 후 1916년 이화 학당 보통과에 교비장학생으로 입학시켜 주었다.

매년 봄 사부인이 서울이나 평양에서 열렸던 여성 선교사 연차 총회에서 보고한 기록을 보면 그녀는 공주 강경 논산 홍성 등 충청남도 일대에 20개 가까이 여학교를 세워 여성의 교육을 통한 개화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작은 규모로 여학당을 세웠지만 그나마 재정난으로 교사 월급을 못줘 애타하는 모습과 미국 교인들에게 기부를 부탁하는 모습이 편지와 보고서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일제의 관립학교들이 지역 곳곳에 세워지며 여학당은 점차 사라졌지만 공주의 영명 여학당은 오늘날까지도 영명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있다. 유관순 열사를 비롯해 한국 최초의 여성경찰서장이 된 노마리아, 감리교 최초의 여성목사 전밀라, 철도간호학교를 세웠던 박한나 등이 그녀의 제자들이다. 이처럼 일제강점시대 한국여성 개화에 헌신한 공적을 기려 1939년 귀국에 앞서 1938년 9월에는 ‘사애리시 선교기념비’가 영명고 교정에 세워지기도 했다. 80년 전 세워진 기념비만으로는 아쉬움이 많았던 공주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발기해 미국 뉴욕과 LA지역의 교인들이 동상건립기금으로 3억 여 원의 성금을 모았다. 한국선교유적연구회가 주도해 3월 1일 오후에 제막되는 동상은 사부인과 남편 로버트, 어린 유관순 열사가 함께 있는 모습이다.

동상으로 함께 있는 모습처럼 1910년 한일강제 합병이 이뤄지는 시기를 전후해 사부인과 유관순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이뤄진다. 나라가 평온한 시기였다면 두 사람의 만남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정치, 사회, 여성운동 방향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국권이 상실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부인이 유관순에게 준 가르침은 ‘나라와 의(義)’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결과는 ‘열사 유관순’이다.

귀국한 사부인은 선교사 양로원에서 1972년 101세로 별세하기 전까지 건강하게 장수했다. 특히 양로원에서 치러진 100세 생일파티는 한국에서 함께 생활했던 후배 선교사들의 축하 속에 진행됐다고 당시 현지 신문인 스타뉴스는 전하고 있다. 후배 선교사였던 안나 채핀(Anna Chaffin)은 사부인의 한국 생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23년 미국의 친구 몇 명이 차를 사줘)포드자동차를 타게 된 후 사부인은 갈 수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가끔은 정말 멀고 깊은 곳까지 걸어 들어가 그 곳 사람들과 만나고 봉사하기를 즐겼다. 특히 그녀는 한국의 산을 뒤덮은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하얀 색 라일락꽃의 풍경을 정말 좋아했다. ⋯그곳의 모든 한국인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진심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다.”

동상의 주인공 사부인이 좋아했던 진달래 개나리가 피기 시작한다. ‘나라와 의’를 먼저 구했던 유관순 열사의 정신도 함께 피어나기를 100주년 3.1절에 기원한다.

【천안=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임연철 미국 드루대 감리교 아카이브 연구원·이야기 사애리시 ‘유관순 열사 신앙의 어머니, 충청 선교의 개척자’ 지은이를 6일 오후 1시 충남 천안시 하늘중앙교회 내 '앨리스 샤프 기념 홀' 카페에서 만나 유관순 열사를 키운 사애리시와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 등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이야기 사애리시’(신앙과지성사)를 쓴 임연철 박사는 올해가 유관순 열사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말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천안=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임연철 미국 드루대 감리교 아카이브 연구원·이야기 사애리시 ‘유관순 열사 신앙의 어머니, 충청 선교의 개척자’ 지은이를 6일 오후 1시 충남 천안시 하늘중앙교회 내 '앨리스 샤프 기념 홀' 카페에서 만나 유관순 열사를 키운 사애리시와 열사의 시신을 인수해 직접 장례를 치른 당시 이화학당 학당장 서리 월터 등 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었다.‘이야기 사애리시’(신앙과지성사)를 쓴 임연철 박사는 올해가 유관순 열사의 서거 100주년이 되는 해라고 말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지난달 28일 개막된 특별전의 사진들은 논산 출신으로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조선일보 편집부국장을 지낸 언론인 임연철 박사가 제공했다.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 1915년 충남 공주 영명학교 학생과 교사들의 단체 사진의 연구원 측은 앞에서 세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소녀가 유관순 열사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맨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사애리시 선교사.

100년 전 충남 인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진귀한 사진들이 공개됐다.

유관순 열사(1902∼1920)의 10대 중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도 포함돼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공주시 중동 충남역사박물관에서 ‘충남인의 100년 전 생활상 특별사진전’을 29일까지 진행된다.

임 박사는 ‘이야기 사애리시’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지난해 미국 드루대 감리교 문서보관소를 방문해 다량의 충남 관련 사진들을 찾아냈다.

이 보관소에는 사애리시(史愛理施·본명 앨리스 샤프·1871∼1972)를 비롯한 미국 선교사들이 1900년대 초반 충남에서 활동하며 촬영한 사진들이 보관돼 있다.

사애리시 선교사는 당시 공주를 중심으로 20여 개 교육기관을 세우고 충남 전역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천안에서 만난 유 열사를 수양딸로 삼았다가 서울 이화학당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시켰다.

임 박사는 “유 열사가 이화학당에 편입(1916년)하기 한 해 전, 공주에서 사애리시 선교사와 지낼 때 찍은 사진이어서 사진 속에 유 열사가 있을 가능성이 정황상 높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높은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단정은 유보했다.

박병희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은 “얼굴 전문가에게 문의해 보니 수형복의 유 열사 사진과 대조한 결과 사진 속에 ‘유 열사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다’는 답변을 얻었다”며 “다만 10대 중반에는 얼굴과 체형 변화가 큰 만큼 추가적인 사진이 있어야 보다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임연철 박사는 다음해에 드루대를 찾아 더 많은 사진을 확보한다는 계획이다.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며, 다음 해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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