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알면 역사가 보인다 낙안요씨 유래

【서울=코리아플러스방송】 오공임 기자 = 낙안오씨(樂安吳氏) 유래

시조 : 오사용(吳士龍)

시조 오사용은 도시조 오첨의 32세손이다.

오사용은 고려 때에 북쪽의 합단과 일본의 침입을 토벌할 때 김방겸과 함께 참전하고 이때의 포로를 원제에게 돌려보내고 금비옥대를 받았으며 왕으로부터 자금어의를 하사 받고 낙안군에 봉해 져서 본관을 낙안으로 하였다.

묘소는 전북 완주군 완주 봉림산에 있다.

과거급제자(조선시대)

오빈(吳賓) : 문과(文科) 명종4년(1549) 식년시 병과(丙科)
오수민(吳壽民, 1719 己亥生) : 문과(文科) 영조41년(1765) 식년시 병과(丙科)
오백안(吳伯顔, 1719 己亥生) : 문과(文科) 세조11년(1465) 춘당대시 병과(丙科)
오중남(吳仲男, 1588 戊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봉길(吳奉吉, 1603 癸卯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언남(吳彦男, 1608 戊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오율(吳○,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4년(1636) 별시 병과(丙科)
오두상(吳斗相, 1660 庚子生) : 무과(武科) 숙종12년(1686) 별시 병과(丙科)
오수겸(吳受謙, 1555 乙卯生) : 무과(武科) 선조16년(1583) 별시 병과(丙科)
오담희(吳淡希, 1576 丙子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등 모두 62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문과 3명, 무과 8명, 사마시 9명, 역과 37명, 의과 2명, 음양과 3명)

 

世와 代는 다른 것으로 世에서 1을 뺀 값이 代가 된다. (예: 16世孫은 15代孫)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전라남도 순천

낙안(樂安)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樂安面)·외서면(外西面)과 보성군(寶城郡) 벌교읍(筏橋邑) 일대를 통칭하던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분사군(分沙郡: 分嵯郡·夫沙郡·波知成)이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분차주(分嵯州)를 설치하고 귀차(貴且)·수원(首原)·고서(皐西)·군지(軍支)를 영현으로 두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분령군(分嶺郡)이라 했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낙안군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나주(羅州)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낙안현으로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으며, 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부사(浮槎)·낙천(洛川)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낙안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낙안군이 되었다.

1908년(융희 2)에 군면 폐합이 실시되어 낙안군이 폐지되고, 내서·외서·동상·동하·초상·초하·읍내 등의 면은 순천군으로, 남상·남하·고상·고하 등의 면은 보성군으로 나누어 편입되었다.

인구수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낙안오씨는 1985년에는 총 1,774가구 7,410명, 2000년에는 총 2,787가구 9,135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낙안오씨 현 대종회장은 吳漢株 오한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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