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오씨 연혁 및 오영우 4성장군 오씨대동종친회 명예총재

함양오씨 재각 함양군 유림면 서주리 사진 오공임 기자
함양오씨 신도비 함양 유림면 서주리 마을 초입에 위치 오공임 기자 

【서울=코리아플러스방송】 오공임 기자 = 1.오씨의 비조(鼻祖)

무혜공 오첨(吳瞻)공이 우리나라 오씨의 비조로 추앙되고 있다.
오왕 부차(夫差)의 후손이신 오첨(吳瞻)공께서는 중국의 5호16국 남북조시대(418년 ~ 589년)의 혼란을 피하여 해남(海南)에 상륙하니 이 때가 신라 지증왕 원년(500년:庚辰)으로 이 해를 오씨 동래기년(東來紀年)으로 삼고 있다.
오첨(吳瞻)공이 처음 정착한 곳이 천령(지금의 함양)으로 전하니, 한국의 오씨는 모두 함양을 조종발상의 땅으로 신성시 하고 있다.
오씨의 상계는 분관할 때까지 24세가 연면하였다.
그 중 역사에 이름을 남긴 오응(2세: 吳膺), 신라시대 북원의 대아찬을 지낸 오기(5세:吳起), 고려태조비인 장화왕후 의 조부 오부돈(10세:富돈),아버지 다련군(11세:多憐君), 예종때 여진정벌의 부원수 오연총(18세:延寵)장군, 인종때 함양군으로 봉해진 오수권(23세:守權), 그의
아들(24세) 현보(賢輔), 현좌(賢佐), 현필(賢弼)이 삼군(三君)으로 봉군됨에 따라 한국의 오씨는 봉군호에 따라 각각 분관하게 되었다.

2. 함양오씨의 시조


함양오씨의 시조는 함양부원군 광휘(光輝)공이시며, 현필공의 4자로 알려져 있다. 생졸년은 미상이나 역사서에 나타난 증손 규(圭), 현손 일악(一악:고려사)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명종말 ~ 고종(1185년 ~ 1250?)때 활약한 것으로 추정된다.
벼슬이 상서성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고, 입상출장(入相出將)으로 반적을 토벌하여 흥위위 상장군이 되었다.
또한 거란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광국정란(推忠匡國靖亂)공신에 책록되어 금자광록대부 함양부원군(金紫光祿大夫 咸陽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이로써 함양오씨들은 함양부원군을 득관조로 하는 함양 최초의 성씨가 되었다. 화장산 남록 자좌원(子坐原)에 예장하니 세인은 그곳을 오장수골이라 부르고 있다.
오늘날 오장수골 화심혈(花心穴)의 잘 가꾸어진 우람한 묘소는 함양오씨의 뿌리요 정신적 본향으로 추앙되고 있다.
(이상 함양오씨의 약사(오주환) 참조)

 

3. 산청파 분파과정


시조공은 장남 열(烈), 차남 홍예(洪芮), 삼남 양예(良芮)와 말자 완(完)을 두었다.
2세이신 삼남 양예(良芮)의 5세손인 7세 諱덕수(德秀)공은 거창에서
산청으로 이거(移居)하셨고, 諱덕수(德秀)공의 장남 8세 諱 걸(傑)께서는 9세이신 장남 맹은(孟誾), 차남 맹주(孟周), 3남 맹기(孟起), 4남
종은(從誾), 5남 계은(季誾)을 두셨는데,
장남 맹은(孟誾)의 3세손 12세 諱칭(칭)을 파조로 한 금계(琴溪)공파, 4세손 13세 덕해(德海)를 파조로 한 정랑(正郞)공파,
9세 3남 맹기(孟起)를 파조로 한 경제(敬齊)공파, 4남 종은(從誾)의
3세손 12세 건(健)을 파조로 한 덕계(德溪)공파, 동 12세 준(俊)을 파조로 한 모와(茅窩)공파, 동 12세 현(俔)을 파조로 한 의당(義堂)공파,동 12세 한(한)을 파조로 한 수오당(守吾堂)공파,
5남 계은(季誾)의 4세손 13세 諱 문도(文道)공을 파조로 한 진사(進士)공파, 동 13세 휘 명심(命深)을 파조로 한 통정(通政)공파로 분파되었다.
위 9개 파는 7세 諱덕수(德秀)공의 장남인 8세 諱 걸(傑)의 자손으로서 모두 4종(10촌)이내에서 파생되었다.

 

4. 진사공파 연혁


함양오(咸陽吳)氏 시조(始祖)이신 諱광희(光輝)公의 3子이신 2세 諱 양예(良芮)의 5세손 7세 諱덕수(德秀)께서는 거창에서 산청으로 이거 (移居)하셨으며,
7세 諱덕수(德秀)공의 3세손 10세 諱 극윤(克倫)公께서는 산청(산음)에서 진주(晋州) 미천(美川)으로 이거(移居)하셨다.
진사공파의 파조(派祖)이신 13세 諱 문도(文道)공은 10세 諱 극윤(克倫)公의 3세손이시다.
파조공께서는 조선 선조때 진사로서 임진란을 당하자 마을장정들을 이끌고 창의하여 학봉 김성일 휘하에서 싸우다가 전장에서 순절하셨다.
애통 하게도 족보 외에 파조에 관한 행장 등 다른 기록을 찾을 길이 없어 후손으로서의 안타까움은 필설로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5. 자손의 발흥
14세 휘(諱)발(渤)공은 派祖공의 유복자로 태어나 二子를 두었으며,
이후 오늘날 26세까지 400여년이 넘도록 美川面 上美里를 世居地로 하여 면면히 그 맥(脈)을 이어 왔다.
파조공을 모신 望雲齋가 美川面 上美里 基田마을에 있으며, 齋內에 파조공의 遺蹟碑가 있다.
특히, 17세에서 20세에 걸쳐 부흥의 발판을 이루었으며, 19세 諱철상
(喆尙)공은 斷指를 한 효자로서 行蹟碑가 있고, 20세 諱응오(膺오)공은 고종때 中樞院議官, 諱응복(膺福)공은 忠勳府都事를 하였고,21세 諱광호(珖鎬)공은 고종 晩年 承政院都承旨를 贈職받았다.
22세 휘도원공, 휘성원공은 파조공을 모신 망운제 및 유적비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23세 상빈공.석규공은 기해보(1959~1961)편찬에 조력하였으며, 오환철은 군무 부이사관퇴임 및 보국훈장수상, 오태권은 육군중령예편 및 보국훈장 수상, 오진철은 사업가로, 현재 파종의 회장 오명철.유사 오길동은 무오보(1978),무인보(1997~1999)편찬에 조력함은 물론 지금도 고향을 지키며 파종의 대소사를 이끌어 가고 있다.
24세중에 중등학교 교장인 오종출.오출형제, 초등학교 교장 오규환, 제43회 행정고등고시 합격후 노동부 행정사무관으로서 미국유학 중인 오기환, 소방서 소방령 오일환, 금융기관 지점장인 오성환.오진환, 신협이사장 오위수 외에도 자영업, 각급 공무원, 초.중등교사, 세무사, 회사원 등으로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5세 후손으로서 한국은행 경제연구소 부원장을 역임하고 도미유학중인 경제학박사 오정근이 있다.
현재 진사공파는 파조공을 모신 齋閣(望雲齋)이 있는 世居地 晋州市 美川面 上美里를 시발로 하여 진주, 의령, 사천, 부산, 마산, 창원, 서울 등지에 약 250여가구(약 500인)가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함양오씨 대종회장 오재훈(변호사)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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