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끈 혁명가 ‘김옥균’

【대전=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정책을 위한 연수를 여행으로 치부하는 언론행태와는 다른 생각이다.

월요일은 서울로 수요일은 대구, 목요일은 전주로 출장을 간다. 2월에는 제주도에 간다. 새해에는 베트남과 일본연수를 계획하고 있다. 버는 돈을 길에 다 깔고다닌다는 내부 푸념이다.  하지만 여행은 새로운 것을 제공 해 줄뿐만이니라 창의적이기에 하면 할 수록 더욱더 하고 싶어진다. 최근에 일본을 다녀온 김미경 교수와 함께 여행을 일상화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이참에 25년 전 충청투데이 문화사업부를 만들었던 기억을 더듬으며 10년 진행해온 국내여행 코리아힐링페스티벌을 2023 해외 코리아힐링프로그램으로 도전에 나설까하는 생각도 해본다. 최근의 전북도지사가 일본과의 교류에 나섰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갖는 생각이다. 이에 더해 대통령의 해외순방과 해외 경제외교 성과들을 속속들이 소식으로 접하면서 한 걸음 나설 자신감을 준다. 역시 대한민국은 뛰어난 선구자들인 역대 대통령들의 해외 행보를 보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23년 출입하다 보니 기자실이 이제 내집 같기에 기자들이 많으면 내집에 온 것 같이 친근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요즈음 대전시의회 기자실이 썰렁하다. 대전시의회가 해외연수에 시민혈세 수 천 만원을 썼다는 최근의 언론의 보도와 더불어민주당 대전시당도 이를 비판 한 것 때문인 것 같다. 대전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18일부터 25일까지 8일 동안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3개국을 방문했다. 산업건설위원회는 19일부터 26일까지 8일간 스페인과 프랑스를 각각 방문을 했다. 언론은 여행사 선정, 패키지 여행일정, 특혜의혹도 제기했다. 국외공무 출장 심의도 서면심사로 대체한 것에 법적인 문제까지 제기했다. 항공료는 얼마였는지, 숙박료는 얼마였는지. 연수과정애 대한 문제점만 제시했다. 여행사를 다른 여행사에서 구입하면 얼마였는지. 얼마나 많은 차이가 났는지. 여행이익이 적정 이윤 이었는지, 아니면 폭리였는지에 대한 보도는 없다. 연수가 나쁜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을 끼워주지 않았다는 불만인지. 자신들이 아는 여행사가 아니라는 이유인지. 

해외를 갖다오면 ‘수천만 원 혈세낭비 여행’이라는 단골메뉴 보도행태는 언제 그만둘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같이 갖다온 공무원들에 대한 보도는 하나도 없다. 공무를 수행한 의원들만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보다는 정책을 담당하는 입법정책실장을 개방형 직위로 해야한다는 보도가 먼저 아닌가라는 생각이다. 이 같은 보도행태에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갖게한다. 해외를 다니면서 선진문물을 접하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개혁과 개방에 나서애 한다는 확신 이었으리라. 근대화를 하면서 개화파는 일본과 미국을 돌아보며 개혁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비록 3일 천하라도. 그를 기억하는 후대가 있기에. 도전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도전을 후대가 되서야 성취됐다. 쇄국만을 목소리 높인 조선은 결국 망했다. 백성들은 세계를 떠도는 유민이 됐다. 의원과 공직자들이 해외 문물을 경험토록 기회를 다 많이 줘야한다. 

새로운 생각을 갖게하는 선진문물 견학은 권하면 권할 수록 좋다. 영재교육을 20여년 넘게하면서 영재들을 만나본 경험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한편 개화기에 개혁을 위해 해외를 오간 선구자들의 행태를 살펴본다. 암살당한 개혁의 불꽃 김옥균(金玉均)에 대해 그 시대는 어떠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 개화파를 다시 읽어본다. 김옥균은 1851년 출생해 1894년 사망했다. 조선을 속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의 내정 간섭을 치욕적이라고 비판했고,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의 개혁을 꾀하고자 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문벌의 폐지, 인민평등 등 근대 사상을 기초로 하여 낡은 왕정사 자체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혁명적 의도를 지닌 근대적 인물이었다.

김옥균은 급진개화파의 지도자로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며, 우리나라 개화사상의 형성에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꺼져 가는 조선의 명운을 걱정하며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개화해야 나라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초에 온건 개혁 노선을 추진했지만 민씨 일파의 반대에 부딪히자 쿠데타를 일으키게 됐다. 하지만 그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소수의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진행된 개혁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외세에 의존하는 부분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강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의지와 애국심만큼은 높이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김옥균은 충남 공주에서 몰락한 양반 김병태(金炳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곱 살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좌찬성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갔다. 열한 살에 양아버지인 김병기가 강릉 부사로 부임하자, 그곳 송담서원에서 이이의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1872년에 스물두 살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했는데 이즈음 민씨 세력과 유림들의 공격으로 대원군이 물러나는 과정을 직접 보게 됐다. 그러자 조정은 민씨 일파의 독무대가 되었고, 외척 정치의 온갖 악폐가 되살아나면서 조선은 점점 수렁에 빠져들었다. 정치에 발을 막 내딛은 김옥균은 이러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조선에는 새로운 사상에 의한 대혁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됐다. 그는 한두 해 전부터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劉大致), 오경석(吳慶錫) 등의 지도를 받고,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홍영식(洪英植) 등과 교유하면서 개화사상을 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뜻이 맞는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게 됐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박규수 다. 그는 박지원의 손자이며 청나라에 다녀온 인물로 당시 사대부들 중에서는 가장 개화된 인물이었다. 그는 민씨 세력이 득세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재동에 머물면서 청년들에게 신문물과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의기충천한 청년들은 그의 집 사랑방에 몰려들어 국가의 장래에 대해 토론하고 모임을 가졌다. 김옥균도 이런 청년들 중 하나였다.

의원 유대치는 오경석, 이동인 등과 같은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선진 문물을 소개하는 책들을 읽고 개화의 중요성에 대해 눈뜬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이념과 지식을 젊은 청년들에게 전하며 신분과 관계없이 스승과 제자로 지냈다. 역관 오경석은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국제 정세에 대해 자연스레 눈뜨게 됐고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청년들에게 중국에서 가져온 책들을 나눠 주었다. 그는 일개 역관이었으나 국제적 외교 절차를 아는 유일한 조선의 관리였다. 일본과 통상수호조약을 맺을 당시 척화파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협상을 추진한 사람이기도 하다. 봉원사 소속의 승려 이동인은 처음에는 유대치와 교류하다가 그의 소개로 김옥균을 알게 됐다. 1879년에는 김옥균의 주선으로 일본을 여행하며 신문물을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문호가 개방되자 김옥균은 사회 각층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충의계(忠義契)’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 그리고 국왕과 측근들을 설득해 개화의 필요성을 호소하며 낡은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지식과 문물을 도입해 근대화하는 것이 격동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와 자주독립을 지키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881년 조정에서는 서구의 문물을 배워 오기 위해 신사유람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12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은 일본에 약 4개월간 머물면서 일본 정부의 수뇌들과 접촉하고 각 부처의 실무를 자세히 조사했다. 김옥균도 이듬해 일본으로 가서 조선소와 제련소, 탄광, 조폐국 등을 시찰하고 개화파의 후원자 역할을 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집에 머물면서 대한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김옥균은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일본은 조선에 군함을 파견했지만 이미 청나라에서 사건을 다 수습한 후였다. 하지만 일본은 피해의 책임을 물어 제물포조약을 체결하고, 공사관을 경비한다는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고 피해를 배상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임오군란을 기회로 삼아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내정 간섭을 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군란 직후 잠시 권력을 잡았던 대원군은 김옥균이 귀국하는 즉시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가 잡히기 전에 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톈진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치 상황은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식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 했던 개화파의 행동반경에도 큰 제약을 주었다. 제물포조약으로 파견된 수신사에 참여한 김옥균은 일본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 일본은 이들을 친일 세력으로 만들기 위해 17만 엔의 차관까지 주선하면서 고종의 신임장을 가져오면 더 많은 차관을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중 5만 엔은 일본에 대한 배상금 1회분으로 지급되었으며 나머지는 수신사의 체류 경비로 사용됐다. 수신사가 귀국한 뒤에도 김옥균은 일본에 남았다. 일본에서는 김옥균에게 자신들의 군세 확장이 조선의 독립을 도와주기 위해서라는 감언이설을 흘렸다. 아직 젊었던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제대로 읽어 내지 못했다.

파탄 난 나라 재정을 메우기 위해 1883년 6월,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간 김옥균은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했다. 그러나 묄렌도르프와 민씨 일파가 여러 방해 공작을 벌이다 급기야 그 위임장이 위조라고 일본에 알렸고, 결국 그는 차관을 얻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실상 일본 정부나 민간 재계에서 당시 일본의 1년 조세 수입의 22분의 1이나 되는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빈손으로 귀국하자 개화파가 2년여 동안 공들여 벌인 사업도 모두 중지되고 말았다. 게다가 수구파가 외채 도입 실패의 책임을 추궁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정계에서 물러나 한성의 교외에서 칩거했다.

결국 순리적인 방법을 통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옥균과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국정을 개혁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됐다. 즉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방법으로 개혁 정책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안으로는 농민들이 수구파에 저항하고 있었고, 밖으로는 청나라가 조선 주둔군 1500명을 안남(安南, 베트남 하노이 지역) 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주둔하는 청나라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어 있었다. 김옥균은 이 상황을 기회로 생각하고 개화파 정치인을 모아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만나 김옥균 일파의 향후 활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일본측과 화해했다.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정동에 새로 신축한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해 윤태준, 한규직, 민태호, 민영목 등 민씨 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세 사람은 고종을 만나 우정국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과 그 원인이 수구 세력에게 있음을 알리고 경우궁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다. 고종이 경우궁으로 가자 일본군이 외곽을 지켰다. 다음 날 이재원(李載元)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새 내각이 조직됐다.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 참판을 맡아 국가 재정을 장악하고, 12월 6일 혁신정강을 공포했다.

내각 구성을 마친 새 정부의 정책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내각의 권한을 확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다. 둘째, 경제적으로는 지주자본을 이용하여 농·상공업을 육성하고, 국력을 진흥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한다. 셋째, 사회면에서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을 지향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안으로는 단발령, 궁내부 설치, 과거제 폐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변이 일어난 지 사흘째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 교전이 일어났다. 여기에 개화파가 일본과 결탁해 국왕을 연금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일반 백성들까지 합세해 엄청난 수의 부대가 궁궐을 공격했다. 일본군은 무기력하게 철수했고 살아남은 개화파 인사들은 다케조에와 함께 일본군의 호위 아래 인천으로 달아나 배에 올랐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또 다른 원인은 민중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소수 지성인들의 거사였다는 점, 외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조선 내부의 기층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0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집권한 민씨 정권은 이들을 대역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만국공법(萬國公法)상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지만, 1886년 8월 이용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오가사와라 섬에 연금시켰고 1888년에는 홋카이도로 이송했다가 1890년에야 풀어 주었다.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1894년 청의 이홍장(李鴻章)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 홍종우(洪鐘宇)에게 암살됐다. 청나라는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했고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됐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의 갑오정권이 수립된 후 반역죄가 사면됐고,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됐다.

(출처 : 글 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등이 있다.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저작권자 © 코리아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