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월간 코리아플러스】 계석일 기자 = 1일 대전기독교단체(cfc) 회원들이 만인산에서 만세삼창을 하고있다. / 계석일 월간코리아플러스기자

【대전=월간 코리아플러스】 계석일 기자 = 기독교 단체인 CFC는 지난 1일 오전 10시 만인산에서 만세삼창을 했다.

전병구 회장은 "손병희 선생을 비롯해 민족대표 33인이 세계만방에 독립을 선언한 날"이라며  3.1절 노래를 우렁차게 합창했다. 

손병희 (사진=네이버)

한편 손병희는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3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늑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손병희 [孫秉熙]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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