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화와 동학

【서울=코리아플러스방송】 장영래 기자 = 군사지정학을 국제관계론 관점에서 알아본다.

이를 세뇌탈출 2808탄을 통해 알아본다.

한편 성직자와 지식인, 회암사지를 네이버에서 알아본다.

고려 사회를 살아본 이성계는 불교가 고려 사람들에게 끼치는 나쁜 영향에 주목했습니다. 절에서 장생고라는 고리대금업도 운영하였습니다. 처음 출발을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주려는 것이지만 차츰 이자만을 목적으로 운용하였고 많은 원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고려말은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였고 그런 사회에서 불교도 사회를 개선하기 보다는 기득권에 편성하여 특권을 향유하였습니다.

​고려말의 개혁파 선비인 정도전은 불교가 가진 잘못을 지적하면서 '불씨잡변'이라는 책으로 이론적으로 불교를 공격하였고 토지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는데 불교계도 가진 토지가 많았으므로 기득권 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는 불교 승려였지만 시대적 사명을 의식하고 불교 개혁의 필요성에 동참한 승려였습니다. 정도전의 스승인 이색도 젊은 시절에는 토지제도를 개혁하자고 공민왕에게 상소문을 올리던 열혈청년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재산이 늘자 토지개혁의 목소리에 침묵하고 개인적으로 불교와 유교를 함께 추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신하들은 유학자들이었는데 왕은 태조 이성계는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었고 신하들이 반대해도 너희들이 이색보다 나은 것이냐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습니다. 이색은 당시 원나라 제과에서 계속 1등을 하던 수재로 원나라가 체면상 최종 1등을 자기 나라 사람으로 하고 이색을 명목상 2등으로 채점한 국제 수준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성계는 개인적으로 태종 이방원이 자신의 아들과 사위들을 죽이자 딸은 비구니로 만들고 자신도 불교에 깊이 빠졌던 인물입니다.

조선이 불교국가인 고려의 문화를 개혁하려고 했지만 세종대왕이 처음 훈민정음을 제정한 후 만든 '월인석보' 같은 책들이 불교적 색채의 책이라는 것입니다. 겉은 개혁하기 쉬워도 사람의 내면의 흐름은 권력을 가지고도 쉽게 바뀌어지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도 불교의 잘못된 점을 보면서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개인적으로 내면에는 불교에 대한 신앙심이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풀이

 지식iN 교육기부 참여로 작성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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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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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신

한국사 50위, 세계사 41위, 사회학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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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으로서 한 정책과 한 사람으로서 믿은 신앙의 차이죠.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종교를 마음대로 믿을 수 있지만 대통령의 정치 활동으로 특정 종교를 강요하거나 지원하면 안된다고 모두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태조 이성계가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믿고 회암사라는 절을 좋아할 수 있지만 동시에 성리학을 이념으로 세워진 국가인 조선의 왕으로서 정책을 펼칠 때는 불교를 배척하고 탄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국가 정책의 큰 틀에서 어긋나지 않는 수준에서 개인적으로만 믿고 좋아했던 것이지 앞뒤가 다른 수준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건 태조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조선 중기인 선조 이전까지 계속해서 국가 정책으로는 숭유억불을 실시하면서도 동시에 왕이나 왕비, 그외 다른 왕족들이 개인적으로 불교를 믿고 시주(기부)를 하거나 심지어 절을 세워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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