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유시사변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자유시=코리아플러스글로벌】 장영래 기자 = 최근 자유시참변에서 고려인의 강제이주까지 논란이 뜨겁다.

이에 지난 1921년 발생한 흑하사변[ 黑河事變 ]자유시사변을 알아본다.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대한독립군단이 레닌의 적군(赤軍)과 교전한 사건.

◇ 역사적 배경

1920년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측은 만주에 있는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독립군을 통합, 재편성해 새로운 대한독립군단을 탄생시켰다. 대한독립군단의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으며, 총재인 서일(徐一)을 비롯해 독립군의 중진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이 곳에 집결한 독립군은 좀더 활동하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위협이 적은 곳을 찾아 국경을 넘어 연해주의 이만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전부터 연해주에 거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문창범(文昌範)·한창해(韓滄海)와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박승길(朴承吉) 등은 연해주로 들어온 독립군이 한 곳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그해 12월초에 하바로프스크의 적군 제2군단본부와 교섭하였다.

밀산에 집결하였던 독립군은 1921년 1월경부터 이만시로 집결하여 부대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자유시에 군대 주둔지를 마련하는 한편 독립군에 사람을 파견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인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허재욱(許在旭)의 총군부(總軍府), 안무(安武)·정일무(鄭一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이청천(李靑天)의 독립군과 군정서(軍政署), 전부터 시베리아에서 무장활동을 해오던 김표돌·박공서(朴公瑞)의 이만군, 최니콜라이의 다반군, 박그리고리의 독립군단, 임표(林彪)·고명수(高明秀)의 이항군(尼港軍), 오하묵·최고려(崔高麗)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등이었다.

수 개의 무장군이 자유시에 집결하여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 확장의 기회가 왔으나 각기 사정이 다른 여러 부대의 집결은 자연 뜻하지 않은 분쟁을 가져왔다. 즉, 적군의 제2군단 제6연대장으로서 흑하지방 수비대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러시아에 귀화한 오하묵과, 이항군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이야 사이에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벌어진 것이다.

◇ 내용

1921년 1월 이용(李鏞)·채영(蔡英) 등은 전한의병대의회(全韓義兵代議會) 소집위원회를 결성하고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와 교섭하였다.

그 결과 동정부 군부에서는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에, 그레골예프를 참모부장에 임명해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동시에 이항군의 명칭을 ‘사할린의용대’라 개칭하고 독립군 및 자유대대 등 모든 무장단체는 사할린의용대의 관할 하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얼마 후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극동정부 군부는 그레골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이야를 군정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그레골예프와 박일이야는 즉시 군대 관리에 착수하였다. 우선 부대 주둔지를 자유시 서북방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정하고 각 부대를 이 곳에 이동시켰다.

한편, 전한의병대의회에서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가 재노령 무장부대를 관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 동양비서부에 교섭해 재로한인무장군을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자기들에게 위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탄생된 것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였다.

후에 정식 군정의회를 조직할 것을 전제로 우선 임시군정의회를 세웠다. 총사령관에 소련인 갈난다라시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임시참모부장에 유수연(兪洙淵), 위원에 김하석(金夏錫)·채성룡(蔡成龍)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정의회의 병력 강화를 위해 적군 5군단 내의 기병[코카서스 기병] 600명과 동군단 내에 소속된 합동민족군[한인부대] 600여 명을 부속시켰다. 공산주의 선전을 위해 이르쿠츠크 공산당 정치학교 제1회졸업생 16명을 대동하였다.

이들 군정의회 간부들은 1921년 4월 14일이르쿠츠크를 출발해 17일치타에 도착하자, 극동공화국정부 군부총장에게 군정의회 성립 경과를 통고하고 각 무장단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부총장은 적군 제2군단에 무장군의 인도를 명하고 치타에 있던 한인부(韓人部)를 해체하였다. 5월 2일자유시에 도착한 군정의회는 무장군의 자유시 집결을 서둘렀으나 사할린의용대를 비롯한 마사노프에 주둔 중인 전한군사위원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사정을 군정의회는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에 보고했으나 당시 병력면의 열세에 처해 있던 군정의회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뒤 5월 28일 합동민족군 600명이 자유시에 도착하고 6월 2일에는 마사노프에 주둔 중이던 홍범도군 440여 명이 자유시로 합류하였다.

6월 6일에는 총사령관 갈난다라시빌리와 의원 유동열(柳東說)·최고려 일행이 코카서스기병 600여 명을 인솔하고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정세는 일변해 군정의회가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해 일본과 소련은 북경에서 캄차카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때 일본 측은 소련영토 내에 일본에 유해한 한인혁명단체를 육성하는 것은 양국의 우호관계에 큰 지장이 있다면서 이의 취소를 주장하였다.

소련도 혁명 후 쇠약해진 국력으로 일본과 불화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해 독립군의 무장취소를 약속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가 내려졌다.

완강히 반대하는 의용군에 대해 군정의회는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을 결정하고, 6월 28일 2대의 장갑차와 30여 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이 날 참변으로 전사한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달리 기록되어 있다. 『재로고려혁명군연혁(在露高麗革命軍沿革)』에는 의용군 측이 사망 36, 포로 864, 병자로 불참한 자 15, 박일이야가 전투 중 인솔하고 도망한 자 34, 행방불명 59명이며, 군정의회측은 사망 2명이라 기록되어 있다.

간도 방면 11개 단체 성토문에는 의용군 측 전사 72, 익사 37, 산중에서 힘이 다해 사망한 자 250여 명, 포로 917명, 군정의회 측은 적군 1명만이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7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78)『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박영석, 일조각, 1982)「자유시(自由市)참변에 대해」(신재홍, 『백산학보』 14, 1973)

북만주 흑룡강성의 아이훈에서 바라본 소련땅 브라코베시첸스크.이 도시의 북쪽에 있는 얄렉셰프스크(자유시)에서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출처: 한국근현대사사전,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저자/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외부 저작권자가 제공한 콘텐츠는 네이버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흑하사변 [黑河事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어 위키백과를 통해 고려인의 강제 이주를 알아본다.

고려인의 강제 이주(Депортация корейцев в СССР)는 소비에트 연방 정부가 연방 내의 고려인을 중앙아시아 등지로 대규모 강제 이주시킨 일로, 1926년에 고안되어 1930년에서 1937년까지 시행되었다. 흔히 소련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여겨진다.[1]

1937년 10월 소련 극동 지방에 사는 거의 모든 고려인(171,781 명)이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2]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선영은 "구소련 스탈린 치하에서 고려인 20만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고, 이 과정에서 2만5천여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3]

◇ 배경[편집]

1929년부터 시작된 제1차 5개년 계획의 실시는 소련의 경제가 거족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시기 소련의 국제환경은 전보다 훨씬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은 만주를 침략한 뒤 소련과의 접경지에다 수십만 대군을 집결시켜놓고 침략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며 매일같이 국경도발 사건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런 형세 하에서 소련의 지도자들은 극동지역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 문제에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이 문제로 생각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지금의 국제형세로 보면 일본군이 소련의 극동을 침범할 위험이 박두해 오고 있다. 2, 일본 첩보기관에서 고려인들을 매수하여 간첩으로 보내고 있는데 일본사람과 섞이게 되면 붙잡기 어렵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일본 당국과 내통하여 일본이 극동지구에 대한 침략을 의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34년부터 극동지구 고려인들속에서도 '일본간첩'과 '이민의 공적'을 잡아내는 숙청운동이 시작되었다. 러시아 극동 지방의 고려인들은 구소련의 국경 소수 민족 중 큰 무리에 해당되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한국은 일본의 강제 점령 하에 있었다. 이들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가난한 농민들이 삶의 터전을 찾아 국경을 넘어 이주하면서 서서히 형성되었다.[4]

고려인의 유입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에 두드러졌다. 1917년 ~ 1926년에는 고려인들이 거의 170,000명으로 3배로 늘어났고, 블라디보스토크 농촌 인구의 1/4을 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으로 러시아 동부의 고려인 집단을 위한 자치령 설립이 모스크바에서 논의되었으나, 토지에 대한 경쟁을 우려한 지역 러시아인들의 반대와 일본에 대한 외교정치적인 고려로 1925년에 최종적으로 거부되어, 결과적으로 그 반대의 정책이 등장하였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지역 단위에서의 고려인 자치권은 허가되었고, 한국어 학교와 신문이 설립되었다. 또한, 이러한 정책 노선은 국경 너머의 일본의 속박과 대조되는 구소련의 소수민족에 대한 모범적인 정책으로서 제시되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1926년 12월 6일 채택된 비공개 계획을 승인하였다. 이는 구소련을 따르지 않는다는 의심이 있는 하바롭스크 북부에 거주하는 88,000명의 고려인의 절반을 이주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주 정책은 정치적, 재정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1930년 이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으나, 1930년을 시작으로 충성심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은 고려인들은 북쪽 지방으로 강제로 이주되었다. 초기에는 작은 숫자였으나[5] 이것이 종종 구소련의 첫 번째 민족 청소로 여겨지기도 한다. 소련당국은 1935년부터 3년 동안 2,500명의 고려인을 "일본 간첩"이란 혐의로 총살하기도 했다.[6] 대규모의 이주는 일본의 침략의 구실이 될 수 있다는 우려로 1937년까지 연기되었다.

◇ 대규모 강제 이주[편집]

이주 계획은 1937년 8월에 일본 첩자들이 러시아 극동 지방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다는 목적과 함께 재개되었다. 그 법적 근거는 구소련 인민 위원회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중앙 위원회의 공동 법령 #1428-326сс로, 극동 러시아 국경 한민족의 이주에 대한 것이었고("О выселен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из пограничных районов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края"),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하였다.[7] 이러한 결정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겐리프 류시코프가 로스토프로부터 전임되었다. 이주는 전형적인 소련의 압박에 이어 진행되었다. 프라우다는 극동 지방의 분리주의 계획의 고발, 극동의 일본 간첩에 대한 기사를 내었다.[8] 이주는 여러 단계의 NKVD 트로이카에 의해 엄중하게 기한을 감독하면서 진행되었고, 시행 중 수백 명의 당원들이 숙청되기도 하였다.

1937년 9월에서 10월까지, 구소련 당국은 극동 러시아로부터 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수만 명의 고려인을 이주시켰다. 172,000명이 넘는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계획적인 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러시아 극동 국경지대로부터 중앙시아로 옮겨졌다. 이들은 열차를 통해 6,400km에 달하는 거리를 이동했는데 그 와중에 최소 수백 명이 열차 안에서 숨졌고, 굶주려 죽은 사람들의 시신은 방문하는 기차역마다 내려 처리되었다.[9]

이들은 당초 계획보다도 많은 44개의 지역으로 분산 이주되었는데, 대표적으로 타슈켄트 지역에 37,321명, 사마르칸트 지역에 9,147명, 페르가나 지역에 8,214명, 화레즘 지역에 5,799명이 정착시켜졌다. 이로써 고려인들은 대부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특별 노동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는데[10] 최종적으로 약 100,000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약 70,000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보내졌다.

1937년 10월 25일, 니콜라이 예조프(Nikolai Yezhov)는 고려인의 극동 지역으로부터의 강제 이주가 종료되었음을 보고하였다. 총 171,781명의 36,442 가구가 이주되었다는 것이다. 캄차카와 오호츠크 지역에 남아 있는 수백 명의 고려인 어부들, 사업차 여행 중인 이들은 11월 1일 열차로 이송되었다.[11]

◇ 이주 이후[편집]

이주한 고려인들은 스스로 콜호즈(집단농장)을 구축하거나 기존에 만들어진 현지인들의 콜호즈에 참여하였고, 작물을 재배하거나 어업에 종사하며 삶을 다시 꾸려나가게 되었다. 이주민들은 가축을 데리고 오는 것은 허가되었으나 그 외에 남기고 온 재산에 대한 6천 루블 상당의 보상금을 받은 이후로는 중앙 정부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했다. 초기에는 정부의 24시간 감시를 받기도 했는데 이후 정부의 무관심이 두드러져 대부분 제대로 된 거주지나 교육 환경도 제공받지 못하였다.[12]

고려인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추위와 굶주림, 풍토병 등에 시달렸으며, 추산에 따라 적게는 1만 6천 명에서 많게는 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이들은 현지 사회에 동화되어 가며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는데 1970년대 조사에 의하면 대학 학위 수여자 비율이 현지인의 2배 수준이었다.[13]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고려인들이 동원되어 전선으로 보내어지기도 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영웅 훈장을 받은 알렉산드르 민의 사례가 잘 알려져 있다.

◇ 영향[편집]

강제 이주로 인해 결과적으로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 지역에 분포하게 되었다. 50년대 이후 고려인 인구는 키르기스스탄이나 타지키스탄 등 주변 지역으로 분산되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지역에 동화됨에 따라 이주 2세대부터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 언어, 문화가 빠르게 흐려져 갔는데, 1970년에 64~74%의 고려인이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2000년대에는 10%만이 한국어를 사용하였다.

스탈린 사후 스탈린 격하 운동이 벌어져 정당성은 떨어졌으나 고려인 강제 이주는 비교적 현대에 와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1989년 소련 최고평의회는 스탈린의 강제이주를 "불법적이고 범죄적"이라고 선언하였으며 1991년 소련에서 통과된 명예회복법에서 스탈린의 모든 강제이주 정책은 민족말살이라고 평가되었다.

소련 해체 이후 고려인들은 헤어진 가족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고려인들의 대한민국으로의 이주가 본격화되어 한국 국내에 고려인들의 디아스포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참조[편집] 각주[편집])

↑ Otto Pohl, Ethnic cleansing in the USSR, 1937-1949, Greenwood Publishing Group, 1999, p.9~20; 일부 내용을 Google Books에서 볼 수 있음

↑ (영어) First deportation and the "Effective manager" Archived 2009년 6월 20일 - 웨이백 머신, Novaya gazeta, Pavel Polyan과 Nikolai Pobol

↑ 박선영 "고려인 20만 강제이주..2만5천명 사망", 연합뉴스, 2011년 12월 5일

↑ (러시아어) A.N. Li, Korean diaspora in Kazakhstan: Koryo saram Archived 2010년 2월 21일 - 웨이백 머신, 2008.11.5. 복원

↑ 1930년에는 500가구 - 2,500명 - 이 북부에 이주되었다. The Origins of Soviet Ethnic Cleansing. The Journal of Modern History 70 (4), Martin, Terry, 1998년, p.813 ~ 861.

↑ “日帝下 해외희생자 발자취를 찾아서 <5>러시아편”. 경향신문. 1995년 8월 8일. 7면.

↑ Korean diaspora in Kazakhstan: Koryo saram Archived 2010년 2월 21일 - 웨이백 머신, A.N. Li, 2008년 11월 5일 확인

↑ Pavel Polyan, "The Great Terror and deportation policy", Demoscope Weekly, No. 313-314, 2007.10.31

↑ Adams, Margarethe (2020). 《Steppe Dreams: Time, Mediation, and Postsocialist Celebrations in Kazakhstan》.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ISBN 9780822987505. OCLC 1223496467.

↑ German Kim, "Korean diaspora in Kazakhstan", Slavic Research Center, Hokkaido University, 1989

↑ German Kim, "Preparation and carrying out of the deportation of Koreans" (Подготовка и осуществление депортации корейцев)

↑ Bugay, Nikolai (1996). 《The Deportation of Peoples in the Soviet Union》. Nova Publishers. ISBN 9781560723714. OCLC 36402865.

↑ Kim, German (2003b). “Korean Diaspora in Kazakhstan: Question of Topical Problems for Minorities in Post-Soviet Space” (PDF).

참고 문헌[편집]

The White Book about Deportations of Korean Population in Russia in 30-40s(Белая книга о депортац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и в 30-40-х годах) Moscow, 1992 (vol. 1), 1997 (vol. 2), Li Woo He (Vladimir Fedorovich Lee, Ли Владимир Фёдорович, Ли У Хэ)와 김영웅 (Ким Ен Ун/Ким Ен Ун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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