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국가보훈처는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선정했다. (사진=국가보훈처)

【세종=코리아플러스】 장영래 기자 = 국가보훈처는 1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선정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역임,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1942년 한인자유대회 개최를 공적으로 밝혔다.

이승만 , 1875 ~1965 , 대한민국장 (1949)의 공적을 1. 미국 유학과 실력양성운동 2.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구미위원부 설립 3. 임시정부 승인 요청과 외교독립운동 순으로 알아본다.

1. 미국 유학과 실력양성운동

선생은 1875년 3월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3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다. 1895년 4월 배재학당에 들어가 자유와 평등 등 근대적 정치사상을 배웠고, 1897년 7월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뽑혀 ‘Independence of Korea’(조선의 독립)라는 주제로 영어연설을 하기도 했다.

1898년 3월 만민공동회 첫 집회에서 군사권과 재정권의 러시아 양도를 반대하는 연설을 하였다. 4월 『매일신문』 창간에 참여하여 편집과 논설을 맡았고, 11월 고종의 독립협회 탄압정책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1899년 1월 고종폐위 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 안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기독교민족주의자로 거듭났다. 그 후 양반 죄수들에게 전도하여 일제시기 한국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한 인사들을 다수 개종시켰고, 죄수들을 위한 학교와 도서관을 운영했으며, 『신영한사전』을 편찬하고, 『청일전기』를 번역하고, 『제국신문』에 논설을 기고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일어나 국가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국민 계몽서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독립정신(1904)

1904년 8월 특별 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헤이(John Hay) 국무장관을 만나 한미조약에 규정된 의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8월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면담하여 한국의 독립 보전을 요청하고 한국민의 청원서를 제출했다.

1905년 2월부터 1910년 6월까지 미국 동부의 명문대인 조지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 프린스턴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라는 박사논문을 집필했다. 대학 재학 중 부족한 학비를 벌기 위해 미국 동부의 기독교단체와 청년단체를 돌며 200여 회에 걸쳐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을 고발하는 강연을 하였다.

190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에서 열린 만국학도공회, 1908년 3월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열린 세계선교사대회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1908년 7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되어 의사진행을 맡았으며, 국민교육에 필요한 서적을 저술·번역·출판할 것을 결의하는 등 점진주의적 독립운동방안을 채택했다.

1910년 10월 귀국 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감으로서 주일마다 오전에는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담당하고, 오후에는 매회 200명 정도가 모이는 성경연구반을 지도했다.

그러던 중 105인사건으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1912년 3월 국제감리교대표회의에 참석한다는 구실로 도미했다. 6월 스승인 윌슨(Woodrow Wilson) 뉴저지 주지사를 만나 한국독립을 역설했다. 이어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동부 대도시를 돌며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한국에 대한 지지를 강조하는 강연활동을 벌였다.

1913년 2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한민족의 독립역량을 기르기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가 세운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을 맡았다가 이를 한인중앙학원으로 개편했고, 1918년 9월 남녀공학제의 민족교육기관인 한인기독학원으로 확대하였다. 호놀룰루 한인기독청년회를 조직했으며, 한인감리교회의 설교를 담당하다가 1918년 12월 하와이 감리교 선교부를 떠나 독립된 교파의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했다. 일제의 한국 기독교세력 탄압을 비판한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했고, 동포들의 독립의식을 강화하기 위해서 순한글 월간지 『태평양잡지』를 발간했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구미위원부 설립

1918년 12월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뽑혀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옮겨와 강화회의 참여를 모색했으나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1919년 2월 파리강화회의 의장과 미국대통령에게 “장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해준다는 확실한 약속하에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에 두어달라”는 위임통치청원서를 제출했다.

한편 1919년 3·1운동 이후 국내외에 수립된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지도자급 인사로 추대되거나 선출되었다. 대한국민의회 국무경, 조선민족임시정부 부도령, 대한민국임시정부·고려임시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 국무총리,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에 이름이 올라갔다.

1919년 4월 14-16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각지의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미국인 기독교 명사들이 참여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했다. 한국독립에 대한 지지를 요청하는 한편, 기독교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한 미국식 대통령제를 본뜬 정부를 원한다는 신국가 건설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4월 30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수반 자격으로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보낸 서한에서 한국의 영문 국호인 ‘Republic of Korea’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6월에 구미 열강과 파리강화회의 수장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지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과 유지를 위한 후원을 요청했다. 동시에 일본 천황에게 한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통고하고 한반도에서 일본군과 식민관리의 조속한 철수를 요구했다. 7월 워싱턴에 대한공화국 공사관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외교선전활동에 들어갔으며,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자”는 내용의 선언서를 2천만 동포에게 공포했다.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한성정부 등을 통합한 ‘통합’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선출(1919)

임시대통령에 오른 후 공채표를 발행하여 마련한 독립자금을 가지고 구미위원부를 통한 외교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이때 미국의 정부와 여론 주도층 및 미국내에서 열리는 국제회의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며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선전활동을 펼쳤다.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에 선출되기 전인 1919년 8월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 직권으로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다. 이는 파리강화회의와 같은 국제회의와 미국정부를 상대로 외교선전활동을 담당할 독립기관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 활약한 김규식이 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승만 선생은 당연직 위원으로서 모든 사무를 총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미위원부는 기부·세납·차관 등의 방법을 통해 재미한인사회와 외국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 받았다. 이를 위해 5종의 독립 공채표를 발매했다. 또한 외국인이 운영하는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라는 친한단체를 미국 중·동부와 서유럽에 설치하여 한국문제를 구미 각국에 알리고 한국을 지지하는 세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한국평론』과『자유한국』을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 서적과 팜프렛을 출판하여 한국독립을 강조하고 일제침략을 규탄했다. 그러면서 헐버트(Homer B. Hulbert) 등 친한파 인사들을 연계하여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강연과 연설 활동을 벌였고, 미국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로비활동을 추진하여 한국독립문제를 상정하고 토의하게 했다.

1921년 11월부터 1922년 2월까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워싱턴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서 한국대표단 단장으로서 외교독립활동을 벌였다. 이때 임시정부와 국내외 각종 단체 및 뉴욕 유학생단체의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대표단에게 발언권을 주거나 본회의에서 한국문제를 정식으로 채택해줄 것을 군축회의에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미·영·프·일 등 군축회의를 주도한 열강들은 한국대표단의 요구를 거부했다.

3. 임시정부 승인 요청과 외교독립운동

임시정부가 전력을 기울여 추진한 워싱턴군축회의에서의 한국독립 문제 상정이 무산되자 임시대통령의 권위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에 따라 신규식 내각이 붕괴하고 임시정부 내 기호파 의원들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이어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싸고 개조와 창조 문제가 논의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때 임시정부의 개조나 창조를 반대하고 현상유지를 내세우며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기도 했다. 1925년 3월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 면직되었다.

이후 선생은 1924년 11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한인대표회를 개최했다. 회의 목적은 1921년 7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교포들의 대동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한 대한인동지회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동지회 총재로 선출되었고, 『태평양잡지』를 동지회 기관지로 정하고, 비폭력주의를 표방한 동지회의 정강을 발표했다. 아울러 한인의 독립운동에 필요한 경제력을 기르기 위해 동지합자회사 설립을 계획했다.

1925년 12월 자본금 3만 달러로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총재를 맡았다. 이 회사는 선박 제조용 목재와 가구 등을 만들어 팔거나 숯가루를 제조해 폭약 제조회사에 판매함으로써 자금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동지촌 부지매입비와 숯가마 구입비로 자본금을 소진한 상태에서 경영 미숙과 미국 전역을 강타한 대공황의 여파로 자금난을 겪다가 1931년 4월경 파산하고 말았다.

임시정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 국제연맹 회원국과 기자들에게 한국의 독립을 요청(1932)

1932년 11월 임시정부로부터 국제연맹에서 한국독립을 탄원할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제네바에 도착하여 국제연맹 중국대표단과 함께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외교활동을 벌였고, 2월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세계 주요 언론사 기자들에게 한국독립을 청원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공한을 보냈다. 또한 각국의 외교관이나 언론인과 교류하면서 동양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우선이라며 한국독립을 역설했다. 이로써 2월 24일 국제연맹 본회의에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한 내용의 「리튼보고서」가 채택되고 일본이 국제연맹에서 탈회하는데 간접적으로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의 국제연맹 탈회 후 미국총영사와 국제연맹 중국대표를 만나 미·중·한 3국이 소련과 합세하여 일본의 대륙팽창을 응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 4개국 항일연대안을 실현하고자 러시아 입국비자를 얻어 1933년 7월 모스크바에 들어갔다. 그러나 만주의 동청철도를 매입하려 모스크바에 와있던 일본협상단의 방해로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하자 11월 하와이에서의 교육·종교 활동을 중단하고 워싱턴으로 이사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Japan Inside Out (『일본내막기』)을 저술하여 1941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침략정책을 일삼는 일본을 제압하지 않으면 반드시 미일전쟁이 벌어질 것임을 예견한 책이다. 아울러 자유·평등·정의가 발휘되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찬양하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체주의와 독재주의 국가들을 비판했다. 이 책은 출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의 진주만침공이 발발함으로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선생은 1941년 12월 진주만사건 발발 전부터 1945년 8월 광복 전까지 임시정부 지원과 재미한인의 외교독립운동을 주도했다.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위원장, 1945년 4월 국제연합 창립총회 한국대표단 단장에 임명되어 활약했다.

특히, 대통령 부인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 여사, 상원 원목 해리스(Frederick B. Harris) 목사, 뉴욕 패트릭 대성당의 스펠만(Francis J. Spellman) 대주교 등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에게 직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는 인사들과 친교를 유지하며 도움을 받았다.

또한 대통령과 국무장관·육군장관 등 미국 정부 요인들, 법무부·육군성·해군성 등 미국 정부 부처, 정보조정국(COI)과 전략사무국(OSS) 등 미국 정보기관, 군부의 장성과 장교들, 상하 양원 국회의원, 유력 언론인·종교인·교육자 등에게 서한과 전보를 보내거나 직접 방문하여 지지를 요청하였다.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 등 미국의 명망가들이 참여한 친한단체를 결성하여 미국의 정부와 정계 및 언론계를 상대로 친한로비 활동을 전개하면서 재미동포들로 하여금 미국정부와 국회의원들에게 서한과 전보를 보내도록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인단체와 친한단체를 동원하여 대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와 같은 대규모 대중집회를 개최하여 미국정부를 측면에서 압박하고,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등이었다.

진주만사건 이후부터 광복 전까지 전개한 다양한 독립운동방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의 국가주권 내지 독립주권의 인정, 한국인의 연합군 가담과 대일항전 참전, 항일전쟁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의 지원과 전쟁 시기 재미한인에 대한 대우 개선을 요청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그러면서 미국의 소리(VOA) 방송을 통해 한국민의 독립의식을 고취하고, 언론과 방송 매체를 통해 일본군국주의의 야욕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워주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독립운동의 최종목표는 한국과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배재학당 재학 때부터 광복 전까지 약 50년간 전개된 이승만의 독립운동은 민족의 독립역량을 축적하려는 실력양성운동과 열강과 국제회의의 지원으로 독립을 이루려는 외교독립운동으로 집약되었다. 전자는 집필·출판 활동, 연설·강연 활동, 학교·교회·회사의 설립과 운영 등으로 나타났다. 후자는 미국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한국의 독립지지 요청, 한국임시정부의 승인 촉구, 한국 독립세력에 대한 군사지원 요청 등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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